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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국오(菊塢) 황만영(黃萬英) 선생의 관(貫)은 평해요 자(字)는 응칠(應七)이며, 원조(遠祖) 유한학사(有漢學士) 휘(諱) 낙(洛)의 후(后)요 행공조참의(行工曹參議) 증이조참판 해월(海月) 휘(諱) 여일(汝一)의 10세손이며 휘 수(洙)의 자(子)라. 단기 4208년 서기 1875년 을해 6월 20일 원평해군(元平海郡) 사동(沙銅)에서 전가충의(傳家忠義) 속에서 태여나셨다. 관인(寬仁)한 도량(度量)과 강직(剛直)한 지조(志操)는 모든 신망(信望)을 한 몸에 지녔으며 소년학방시(少年學房時)에 문필이 웅휘하고 특히 신구병서(新舊兵書)에 조예(造詣)가 깊으시었다. 때는 과거 반세기(半世紀) 동안 일제(日帝)의 침략(侵略)은 이 나라를 짓밟고 한민족을 여지없이 압박하는 이래 수많은 애국지사는 항일 구국에 생명과 재산을 던져가면서 중첩(重疊)한 신고(辛苦)로 침략자를 저항하여 온 기중 한 사람이 국오(菊塢) 선생(先生)님이시다. 일제는 서기 1894년 청일전쟁(淸日戰爭)과 1904년 노일전쟁(露日戰爭)에 전승(戰勝)을 득한 여위(餘威)의 마수(魔手)로 한국을 침략함이 노골화되어 소위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인 치욕의 늑약(勒約)을 받게 되자 국내의 풍운은 날이 갈수록 험악일로(險惡一路)로 되어갔다. 각처에서 의병이 봉기하자 선생께서 솔선적으로 엽전 800냥을 내둔(來屯) 중인 성익현(成益鉉), 호좌진(胡佐眞)의 진(陣)에 희사격려(喜捨激勵)하였고, 누차 상경하여 양기탁(梁起鐸) 외 제사(諸士)들과 구국의 대의를 논하고 독립협회(獨立協會)와 관동학회(關東學會)의 일원이 되었고 위선 구국의 길이 국민교육(國民敎育)을 신문명개화(新文明開化)로 지향하여야 된다 하시고 울진 주진수(朱鎭壽) 동지의 매화만흥학교(梅花晩興學校) 설립과 동시 1907년 평해군 최초로 사동대흥학교(沙銅大興學校)를 사재로 창설하고 영재(英材)를 배양하여 오시다가 1910년 경술 8월 29일 민족사상 최대 오점인 한일합방의 국치(國恥)를 당하자 적괴(賊魁)는 양학교(兩學校)를 배일(排日)의 온상이라 하여 모두 폐쇄하였다. 선생은 실국(失國)을 당한 분한은 좌이대사(坐而待死)할 때가 아니라 생각하시고 1911년 국내항일지사(國內抗日志士)들과 성맥(聲脈)을 상통하여 만주 서북간도(西北間島)를 이민영농(移民營農)과 독립군양성근거지(獨立軍養成根據地)로 택정(擇定)하고 의병잔여부대(義兵殘餘部隊)와 함께 농호이주(農戶移住)가 시작되었다. 위선 인접군(隣接郡) 제동지(諸同志)인 안동(安東)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 영해(寧海) 만성(晩醒) 박경종(朴慶鍾), 울진(蔚珍) 백운(白雲) 주진수(朱鎭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