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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에 분대장도 충의의 말이라고 숙연하였다. 1915ㄱ년 소위 총독 시정5년 기념공진회를 경성에서 개최하고 전국인에게 관람케한바 인솔군수는 람후 소감을 문한후 궁전과 성문은 의구존재나 주인이 반기고 금일에 아심비분감개할뿐이라고 하자 군수 이택규에게 저지당하였다. 기미3.1운동후 제동지와 함께 울진청년회를 창설하고 회장에 추대되여 청년운동에 심혈을 경주하고 회우보사건으로 경찰에 심문도 격심 1920년 전 한국 역둔토지를 일인에게 매각하게됨을 군수와 서장에게 기부당처리를 반교 본군 덕신 수산 흥부 3개처를 한국인에게 균등분매하도록 하였다.1922년 울진 제동학교 전신인 울진강습소를 설립하고 소장으로 췸하여 학생들에게 나는 그대들을 위하여 거름이 될터이니 크게 성장하라고 민족기혼을 교양하여왔다. 1932년 7월 상해임시정부 특파원 의령인 안희제와 동지 최특파원이 화성리 문용석 안내로 공을 심방 임정자금 80원을 조달하였다. 1938년 죽변 축항 기공당시 동안리축지는 일본인들이 해면접계까지 매점되여 한국인 선박처가 없게되자 분연 상도하여 강원도지사에게 도행정이 부당함을 통질하여 한국인에게도 각자 매입하게되였고 서부안벽통로도 설치 4278년 1945년 8.15해방을 맞지하여 전 울진청년회와 제동학교 동지들이 8월 17일 조선건국 울진동지회를 조직 고문으로 추대되여 미군이 울진진주하여 군정고문으로 선촐되였다. 동12월 상해임시정부요인이 귀국하자 누차 상경하여 이승만박사및 김구주석 제요인과 건국사업에 대한 심기를 상토하고 한국독립당원으로서 대한독립촉성회 울진지부장및 국민회장으로 활동 정부수립에 지대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그러나 국토는 양단되고 정계는 불안이 누첩되여감으로 국가흥존에 크다란 관심을 가지고 6.25동란 10일전 상경하였다가 병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