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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正史)는 숨쉰다. 매봉산 일맥이 동해로 뻗어 넘치는 정기로 솟아 만든 칠보산(七寶山) 옛터! 흥부(興富)장터! 우리 선조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목이 터져라 외쳤던 북면(北面)의 정기(精氣)이자 울진의 혼(魂)이 서린 이곳. 경술년(庚戌年) 왜구(倭寇)가 우리의 국권(國權)을 늑약(勒約)하자 전국의 선열들은 분연히 일어서서 항일운동(抗日運動)을 일으켰다. 기미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대한(大韓)은 자주 독립국(自主獨立國)임을 만방에 선포하는 「독립선언문」이 낭독되자 방방곡곡에서 만세운동이 전개(展開)되고 있을 때 양주(楊州) 사람 박사영(朴士永)이 서울로부터 「독립선언문(獨立宣言文)」을 가슴에 품고 고목리 지장동(芝藏洞)에 잠입하여 선언문을 접한 동네 사람들은 분루(忿淚)를 삼키며 군내(郡內) 장날을 기하여 의거(義擧)할 것을 결의하였다. 1919년 4월 13일 정오 고목사람 전병항(田炳恒), 남병표(南炳豹) 두 사람은 여러 동지(同志)들과 시장에 들어가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동참을 권유하며, 태극기를 펼쳐들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천여 군중이 따라 외치니 장날은 흥분의 도가니가 되어 그 기세(氣勢)! 노도(怒濤)와 같았다. 주동한 두 사람은 출동한 일헌(日憲)에게 체포되어 부산형무소(釜山刑務所)에서 각각 7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그날 저녁 흥부(興富) 사람 김일수(金一壽)는 일상(日常) 『매일신보(每日申報)』 강독(講讀)으로 전국에서 3·1운동이 전개됨을 알고 있던 중 낮에 흥부시장에서 만세를 주도(主導)한 전(田), 남(南) 양인(兩人)이 구금(拘禁)됨을 알고 분기충천(憤氣沖天)하여 동내 청년 황종석(黃宗錫), 홍우현, 김기영(金琪榮), 김도생(金道生), 김봉석(金鳳錫), 김재수(金在壽)와 나곡 사람 박양래(朴揚來), 삼척(三陟) 월천(月川) 사람 이상구(李相龜) 등과 의거(義擧)를 결의하고 시장에 들어가 태극기를 들고 행진하면서 고성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출동된 일헌(日憲)과 격투 끝에 모두 체포되어, 주동한 김일수(金一壽)는 7개월, 그외 7명은 4개월의 옥고를 부산형무소(釜山刑務所)에서 치렀다. 이제 그날의 만세운동이 옛이야기가 됨이 아쉬워 주민의 뜻을 모아 의거현장(義擧現場)에 광복 50주년을 맞아 탑(塔)과 비(碑)를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