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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휘는 언륜이요 본관은 월성이다. 울진 입향조는 시지 은설공의 15대 손인 조선 세종때의 군수 휘 광우이시며 문장과 학행으로 당대에 명성을 떨쳤다. 속은 조선 명종 20년(1565)에 현 울진군 북면 고목리 지장골에서 태어났다. 소년 시절에 학방에서 한학공부와 병서읽기 활쏘기를 잘하여 스무살 경에 무예에 출중함이 고을에 널리 알려졌다. 선조 25년(1592) 4월에 소서행장의 왜군이 조선을 침략하자 전국에서 의병이 창의하였다. 북상하던 왜군은 전국 대부분을 침탈하였고 행주산성에서 패한 왜군 일부는 강릉지방과 동해안으로 남하하여 울진 고산성 전투에서는 주호장군이 전사하고 의병장 김운륜은 창의군을 이끌고 장유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쳐들어오는 왜군을 벌이개와 분투골로 몰아 쇠도리꺠로 왜군을 대파하였다. 공은 전투에서 적의 수급을 많이 참획하였을 뿐만 아니라 노획된 왜군의 재물도 많았으므로 그 전공을 가로채려는 울진 현령 이언선이 공을 온갖 방법으로 모함하여 마침내는 공을 죽이고야 말았다. 선조 39년(1606)에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공의 공적과 억울한 죽음을 상소하여 당시 고성 현령 이언선을 사판에서 삭거하라 명하소서 하니 윤허한다고 답하였다. 공의 모제는 후손과 마분동민이 분투골에 무덤을 마련하고 묘제를 수백년 동안 지내오다가 광복후 울진군 교육청과 윤병한 선생이 지역민들이 고의 묘소를 장유대로 옮기고 모제를 받들어 왔다. 1997년 울진군에서 공의 묘소를 성역화하고 북면 청년회가 주관하고 북면주민들이 제사를 모시고 관리해왔다. 2009년 공의 묘역이 신 울진원자력 발전소 부지로 편입됨에 따라 북면 주민들이 이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