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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는 불명한다. 의를 숭상하며 불의에 불복한 충절의 고장 울진! 한 편생을 조국광복을 위하여 나라안밖에서 항일운동유공자로 1991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의 사전을 받은 백운 주진수 일명 주선생은 신안인 주병철의 아들로 1878년 7월 11일 죽변면 후정리 매화정동 자택에서 출생하니 시조 주부자희의 증손인 청계공 휘 잠의 28세손으로 울진인 향조 전적공 선림은 15대조며 교원공 세창은 13대조이고 당세문 장가인 이우당 휘 개신의 11세손이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천성이 의롭고 재국이 출중하여 본가에서 세전하는 한학과 신학문을 연수하여 문사가 높았으며 매사에 명철한 사색력이 남과 달랐다. 집이 가난하나 생계를 유지하며 자식의 도리를 다하고 부모의 효성이 지극하니 마을사람들이 효자라 칭하였다. 당시 시국은 로일전쟁이후 나라의 형편이 날로 잘못되어간데도 일제의 간계에 빠져들어가는 국민을 보고 통탄함을 금할수없자 상경하여 남궁억선생이 창도하는 관동학회에 가입하고 서재필박사가 영도하는 독립협회에 들어가 강원도 책임자로되어 항일운동에 앞장섰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나라가 일제에게 천추의 굴욕을 받게되자 전국 각지에서는 의사들이 의병을 규합하여 혈전이 벌어지고 그들의 신무기에 대항하기 힘들어 선생은 정신적무장이 시급함을 관악하고 귀향하여 동지들과 뜻을 모아 1907년 10월 원남면 매화리에 매화만흥학교를 창설하여 학생들을 모아 시국형편을 일깨워주며 국권회복과 독립사상을 고취시키며 당대 국가 일류층인 정인보, 박례철, 기태진, 남정섭선생을 초빙하여 교수케하니 청소년학생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일년후 황만영선생이 본향 사동에 대흥학교를 설립함에 선생은 적극도왔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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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해 안동 강릉등지에서 잇달아 의숙이 설립되니 우리민생을 일깨우는데 크게 이바지 하였다. 선생은 1909년 봄 신민회 간부인 양기탁, 안태국, 이동녕등과 만주에 제2독립기지 건립계획에 강원대표가 되어 군자금 10만원을 마련토록 배정받았으며 1910년 8월 김구선생과 양기탁씨와 함께 서울의 일본총독부를 대립하는 도독부를 설립하고 1911년에 일제가 조작한 테라우찌 총독암살사건에 연루되어 유동설등과 함께 일경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아가며 2년의 옥고를 치렀다. 간도이민계획실현을 위해 군자금을 모집하던 안명근사건에도 관여하고 출옥후 가족을 이끌고 만주 유하현 삼원보 경가가에 정차할때 만흥학교 제자인 장식은 당시 비서로 활동하고 선생은 이시영선생과 이상용 이동녕 김동삼등과 경학사를 조직하는 한편 신흥강습소를 설립하는등 독립기지건설에 참여하였다. 1914년 세계 제1차대전이 일어나자 선생은 만주에서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하고 러시아 정부의 밀약청원에 의하여 재만한국독립군을 이끌고 동청철도를 수비하는데 선생 대장으로 활약했으나 사건이 일어나자않아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1919년 기미독립운동때는 만주에 이민온 동포들과 만세운동을 전개하고 그해 4월 13일 상해임시정부수립후 강원도대표로 활약하였다. 1920년 10월 만주 화룡현 청산리에서 김좌진 이범석 양장군의 참모의 1인으로서 독립군불과수로 일본군 1연대를 격전 5시간만에 섬멸시킨 혁혁한 무훈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