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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이씨 신라조 좌명공신 휘 갈평의 후로 영은 장발의 자 목익공의 보명은 상예이요 호는 죽헌이라 서기 1867년 10월 26일 원 평해군 온정면 소태리에서 출생 구한말 거유인 창의대장 의암 유인석문하 수학시에 친필사호의 기용을 받어셨다. 품성이 강직하고 기우가 호매하여 사이등랑을 경계하셨으며 고종조에 외세침략으로 국사일비를 개탄하시고 동문 선배 이강년의진에 군자금조달도 하셨다. 서기 1910년 경술8월 29일 소위 한일합병이라는 적수포고가 발표되자 공은 관분과 비통에 단식 와석으로 위국순사키로 결심하였든바 자 흥 질의 권식이 난감할 뿐 아니라 주사무익임으로 내일의 의거를 생각하여 3일만에 식상을 대하시여 인치의 시일을 보내는 중 기미3.1독립운동이 궐기됨에 기제 화익공은 온정면 만세사건으로 적헌병에게 체포투옥되었고 혹독한 조선총독부의 식민정치는 경제적 착취수단으로 한민족은 모두 파산에 직면하게되자 공은 1920년 10월 22일 일본물품 배척 포고문을 각 요처에 게시하고 한국물산장려를 호소하였든바 이사건으로 적경에 체포되어 울진본서로 압송됨에 서장의 설유에 불굴하고 적수의 퇴거를 통설하였다. 유치 14일만에 대구지방법원 울진지청에서 금고 6개월형을 받아 부사형무소에서 복역하셨다. 1919년 1월 고종황제의 국휼때부터 공은 백립을 쓰기 시작하여 3년 탈상 후에도 구국선열의 충혼을 조위하는 뜻으로 8.15광복절의 그날까지 쓰셨으니 세칭 백립옹이라 하여왔다. 해방이 되자 조선건국 울진동지회를 내방하여 과거의 심회를 말씀하시면서 이제는 사무여한이라고 내회하셨다. 1949년 9월 21일 향년 83세로 별세하시다. 공의 친제 화익공의 보명은 상헌이요 호는 삼사라 서기 1874년 9월 6일 혼정면 소태리에서 출생하시니 한학방 수업으로 지조고매하고 성도강개하여 사친지효하셨다. 적 일제의 강압적 한일합방이 되자 실국의 비분을 참을길 없는바 기미년 3월 1일 대한독립운동이 봉기되자 울진에서는 3월 11일 매화시를 위시하여 흥부시까지 만세운동이 전개되어 지도책임자 23명이 울진법원 지청에서 제령 제7호의 판결을 받아 부산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공은 벽촌에서 울진동지들과 연락이 안 되었으나 4월 5일 울진군수가 시국 강연차 온정면에 출장하여 면민을 소집하고 만세운동에 불참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