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page


107page

이목익 선생은 1920년 울진군 온정면 소태리에서 일제의 생산품을 배척하자는 문서를 소태 주재소 앞과 온천장 숙소 및 선미리, 온천리 2곳과 평해면 평해시장에 각 1매씩 붙였다. 또한 동양척식회사와 식산은행, 금융조합과 왜인고리대금업자의 착취로 한국인의 파산이 날로 늘어나자 같은 해 10월 22일에 일본물품배척포고문을 각 요소에 게재하고 조국의 토산물 애용을 호소하던 중 일경에 피체되었다. 이로 인해 그는 1920년 12월 21일 대구지방법원 울진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금고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화익선생은 1919년 4월 13일 경북 울진군 부흥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경북의 인근지역들은 3월 중순부터 만세운동을 일으켰던데 비해, 울진은 지리적으로 태백산맥 동편에 위치하여 교통이 불편한 관계로 만세운동의 소식을 늦게 접하였다.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하였던 이화익은 뒤늦게 만세운동 소식을 접하고 4월 초부터 울진에서의 만세운동을 계획해 갔다. 그는 김광수·남병모 등과 4월 13일 부흥 장날을 기해 거사하기로 결의하고 동지를 포섭하는 한편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그리하여 거사 당일에 이화익은 부흥 장터에 운집한 수백여 명의 군중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때 시위행렬의 선두에 서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던 그는 마침 출장중인 울진군수 강성희가 시위를 해산하려 하자, 오히려 군수에게 한국인으로써 최소한의 민족적 양심을 지킬 것을 주장하여, 군수로 하여금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게 하는 등 만세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시위 도중 그는 출동한 일본 헌병에 의해 피체되어 1919년 4월 17일 대구지방법원 울진지청에서 소위 공무집행 방해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자료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