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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 모든 것이 비범하고 학문을 연수함에 있어서 유달리 병서를 좋아하였다. 국운이 기울어짐에 왜적이 1904년에 소위 을사보호조약이란 것을 빙자해서 침략하기 시작했다. 국내 각지에서 피끓는 청년남녀가 봉기하여 적을 대항하게 됨에 동해안을 담당한 우리 고울의 의병대장인 신돌석 장군이 기치를 높이 들고 의병을 모았다. 공이 달려가서 장군을 뵙고 전략을 의논하니 심복으로 믿고 영솔장에 임명하게 되니 공은 더욱 감격하여 결사 혈맹하였다. 익년 여름에 장군의 명을 받아 통곡 아곡리에 진지를 구축하고 바야흐로 출격하려는 즈음에 적의 무리가 밤을 타고 다가와서 사면으로 공격하니 포연탄우 속에 아군은 여존자가 수십명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공은 끝내 결사고투를 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마침내 흉탄에 의하여 순국하시니 때는 1907년 무신 6월 26일이었다. 시체를 걷우어 도계동 절골 앞산 신좌동에 안장을 하게 되니 향년이 겨우 33세였다. 부인은 평산신씨니 치회의 따님으로서 1남 3녀를 낳으니 남은 낙기요 여는 남홍진과 박종범과 남성진에서 각각 출가하였다. 아! 공의 위국충절은 지난날 고인에 비하여도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며 또한 닥아오는 앞날에 있어서도 빛나는 모범이 될 것이다. 공의 종질 윤기가 나에게 비명을 청탁하기에 어찌 굳이 거절할 수 있으랴. 다만 위와 같이 그 전말을 개술하고 이어서 명을 하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