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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둘째 아드님으로 경북 영덕군 창수면 신리에서 출생하여 백부 수인의 후로 출계하게되다. 성품이 인자하고 의용이 헌앙하였으며 어려서는 본가에서 한학을 전수하였으나 뜻한바 있어 신학문을 배우려고 대구교남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압박이 날로 우심하여지자 동교를 중퇴하고 각지를 순회하면서 구국사상을 고취하였다. 이윽고 서기 1919년 2월 1일을 기하여 거국적인 항일운동이 전개되자 선생은 귀향을 서둘러 동지들을 규합하고 군중을 동원하여 독립투쟁을 결행하기에 이르렀다. 독립취지문과 태극기를 만들어 동지들에게 배포하고 3월18일을 거사일로 정하니 그날 영해면주재지에 집결한 군중은 수천여명이나 되었다. 선생은 군중을 이끌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위를 벌리는데 성공하였다. 선생은 다시 여세를 몰아서 창수에 있는 일제시 관서를 습격하여 동포에게 불리한 문서와 집기를 모두 소각폐기하였으며 시위군중의 의거는 다음날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일헌의 출동으로 시위군중은 해산되어버리고 선생은 동지들과 피체되어 대구형무소에서 4년간의 옥고를 겪었다. 선생은 출옥후 민족혼의 고취에 뜻을 두고 1935년에 고향인 서면 창수에 동창학원을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했으나 일경의 탄압으로 문을 닫고 말았다. 선생은 이렇게 구국일념으로 일관해오다가 환의의 조국광복을 맞았다. 그러나 악형의 여독으로 1951년 1월 23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이 58세였다. 1968년 3.1절에 조국광복에 이바지한 공로로 대통령표창이 내려젔다. 슬하에는 .... 후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