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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돌석장군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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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돌석 장군 유적지 / 申乭石 將軍 遺跡地 우리나라가 일제의 침략에 짓밟혀 갈 때, 나라와 겨레를 구하기 위하여 '항일'의 깃발을 높이 세운 분이 있었으니, 바로 신돌석(申乭石) 의병장(義兵將)이었다. 1878년 11월 3일 이곳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에서 태어난 장군의 본명은 태호(泰鎬), 어릴때 이름이 돌석이었다. 용맹과 기백을 타고난 장군은 1896년 경기도 광주의 김하락(金河洛) 의병부대가 이곳 영덕으로 이동해 오자, 18세의 어린 나이에 이미 중군장(中軍將)으로 참전하여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뛰어난 힘을 발휘하였다. 을사조약이 강제로 맺어지자, 장군은 1906년 3월에 영해지역의 청년들을 모아 영릉의병진(寧陵義兵陣)을 조직하고 본격적으로 일본군 토벌에 나섰다. 2년 8개월 동안 청하·영덕·영해·청송 ·울진·의성·영양·봉화·삼척·강릉 등지를 오르내리며 수많은 전투를 전개하였으니, 일본군은 장군을 '태백산 호랑이'라 부르며 두려워 하였다. 1908년 12월에 엄동설한 추위를 앞두고 의병진을 일단 해산시킨 장군은 활동무대를 만주로 옮기고자 계획하던 중, 그 달 12일에 일제의 앞잡이에 의해 영덕군 지품면 눌곡리에서 살해되었다. 장군은 30년 짧은 생애 가운데 청년시대 12년을 의병항쟁에 몸 바쳤고, 오직 민족을 위해 살다 갔다. 우리 정부는 장군의 공을 기려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고, 1971년 국립묘지 유공자 묘역에 그를 안장하였다. 그리고 영덕군과 국가보훈처는 장군의 애국충절을 기리기 위해 탄생지인 이곳을 성역화(聖域化)하기로 결정하고, 1996년 12월부터 1999년 11월까지 사당(祠堂) 1동,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각 1동, 기념관 1동을 세웠다. 이곳을 찾는 사람마다 장군의 뜻을 헤아리고 나라와 겨레를 생각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