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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산 김선생 도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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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 들어 항일전투에 몸소 지휘행진하신 그 빛난 정의의 발로가 우리민족상에 길이 푸르렀다. 그러나 익주의 피폐를 공명의 외힘으로 돌려 잡을수 없고 송조의 쇠망을 악비의 단손으로 붓들수 없었다. 대세가 이미 기우려짐에 선생은 비분강개의 눈물을 뿌리시며 임원으로 잠간 발을 돌릭셨다. 그리하여 광복의 대업이 영재배양에 있다는것을 깨닫으신 선생은 또다시 육영사업에 정력을 기우리셨으나 때는 이미 늦어 결술년국치를 당하였다. 나라를 잃은 의사의 갈길이 오직 수양의 고사리를 캐는것밖에 없건만 이것도 오히려 주나라의 우로에 젖고 자람이라 차라리 이땅을 초연히 떠나려는것이 선생의 결심이었다. 진나라의 가정을 몹시 싫어서 동해를 밟겠다는 노연의 제호는 다만 이론에 불가한것이나 이것을 실천으로 옮긴이는 오직 우리겨레의 벽산선생이다. 그리고 순의의 탁절도 순간적 즉결은 오히려 쉬운일이언만 노부의 여년을 기다려 종용히 효의병행의 양전을 갖춘이가 바로 벽산선생이다. 그 불타오르는 애국의 정렬은 백일을 높이 뀌었고 그 깨끗한 사절의 방법은 창랑에 몸을 감추셨다.서기 1914년 갑인 11월 7일 동짓날 이른 아침에 바다로 드러가신후 영남선비들이 선생을 추모하여 석기 1915년 을유3월 13일에 비를 세웠으나 포악한 일제가 그것을 뽑아 버리고 빈터만 남아있는 이자리에 대한민국정부에서 오늘 다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