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page


106page

영덕군 창수면 신기리 산 20 애국지사 조태헌의 묘소 앞 기념비를 찾아왔지만 네비게이터는 저 산 속이라고 하는데, 어디 물어볼 곳도 없다. 아쉽지만 다음에.
106page

1919년 3월 18일의 영해읍(寧海邑) 장날을 이용하여 전개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영덕군 지품면 낙평동(知品面洛坪洞)교회 조사(助事)로서 유학(留學)차 평양(平壤)으로 가다가 서울에서 전개된 독립선언식과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후 평양행을 단념하고 즉시 귀향한 김세영(金世榮)과 구세군 참위(救世軍參尉) 권태원(權泰源) 등에 의해 계획되었다. 이들은 3월 18일의 영해읍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군내의 영해면·병곡면(炳谷面)·축산면(丑山面)·창수면(蒼水面)의 기독교도와 농민층을 광범위하게 규합하면서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사전준비를 마쳤다. 특히 그들은 대중규합에 있어서 토착 향반(鄕班)인 군내의 권(權)·남(南)·박(朴)·백(白) ·이(李) 등 5성을 기반으로 하였는데, 이때 그도 거사계획을 전해듣고 이에 적극 찬성하였다. 3월 18일 오후 1시경, 그는 남효직(南孝直)·남여명(南汝明)·정규하(丁奎河) 등 3천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성내동(城內洞) 장터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전개한 후, 경찰주재소로 달려가서, 일본 경찰들에게 독립만세를 부르라고 위협하여 그들도 독립만세를 부르게 하였다. 그가 장터로 돌아가서 만세시위를 전개하고, 다시 시위군중과 함께 주재소로 갔을 때, 주임순사 영목학차랑(鈴木鶴次郞)이 거만한 태도로 해산을 명령하며 태극기를 뺏으려 하였다. 그러자 분노한 시위군중은 곤봉과 돌멩이로 주재소를 때려부수고 순사부장을 넘어뜨린 후, 2명의 일본 순사의 모자와 칼을 빼앗았다. 그후 공립보통학교로 시위행진하여 평소 일제의 정책을 찬양하던 이곳 교사들을 규탄하고 건물을 파괴한 후, 일본인 소학교·우편소·면사무소를 차례로 파괴한 후 다시 주재소로 몰려갔다. 주재소에 도착하여 독립만세를 외치고 찬송가를 부르며 만세시위를 전개하고, 주재소 안에 걸려 있던 경찰복을 모두 찢어버렸으며, 비치되어 있던 장총 4정과 87발의 실탄을 파기하였다. 이날 오후 2시경, 그는 정규하 등 2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병곡면 병곡동으로 시위행진하였는데, 연도의 군중이 이에 가세하여 시위군중은 5백여명으로 늘어났다. 이때 영해주재소로부터 연락을 받은 병곡주재소에서는 인근 평해(平海)의 일본 헌병분견소에 응원을 요청하고 삼엄한 경계를 하고 있었다. 그가 시위군중과 함께 주재소 앞에 다다랐을 때, 일본 경찰이 이를 제지하자, 투석으로 대항하며 곤봉과 낫 등을 들고 주재소 안으로 들어가 건물을 파괴하고, 기물을 파기한 후 면사무소로 가서 그곳 건물도 완전 파괴하였다. 그러나 평해에서 응원 출동한 3명의 일본 헌병과 주재소 순사가 합세하여 총을 겨누며 위협하자, 정규하의 만류로 오후 6시경, 자진 해산하였다. 그후 일제는 대대적인 검속을 펼쳤는데 결국 그도 이때에 체포되었으며, 이해 9월 30일 대구(大邱)복심법원에서 소위 소요·공무집행 방해·건조물 손괴·기물손괴·공문서 훼기·상해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