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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품면 속곡에 이르러 전열을 다시 가다듬어 기회를 도모할 즈음에 한 첩자의 밀고에 의하여 왜병들의 습격을 받아 피신하지 않을 수 없게 되였다. 그런데도 삼종질인 신태홍씨가 공과 비슷한 용모라서 혐의를 입어 신안까지 연행되였다는 소식을 듣고 공께서 대경실색하시고 스스로 나아가 내가 의병장이라 밝히고 태홍씨를 석방시켰다. 북송정에 이르러서 장차 왜놈의 가혹한 고문에 못이겨 혹시라도 입을 열어 동지들에게 피해를 끼칠가바 염려한 나머지 공은 혀를 깨물어 문초에 불응할 결심을 하였던 것이다. 예측대로 청심 왜분파소에 와서 취조를 받는데 함분유혈을 품으며 시종 불굴하다가 총살되니 동년 병신 8월 초3일이라. 나이가 58세였다. ○라 안동향교의 각지 향유들의 만계와 창의한 동고록이 있었더니 6.25때 소실되여 그 활동한 바를 소상히 밝힐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제 향내 고로들의 목격한 바와 그 구전의 신 ○로서 도리켜보건대 당시 사림들의 의병활동이란 공명을 도모한 것이 아니였다. 어찌 증빙 문건을 온전히 보전할 수가 있었으랴. 오직 아름다운 이야기로 이어지면 족한 것이었다. 영덕 향유들이 공의 지절을 밝혀서 한 조각 돌을 세우고저 함은 뒷사람들이 우러러 바라보고 감탄할 뿐만 아니라 의를 깨우쳐 충과 효를 본받게 함이더라. 아울러 이 고장의 고족인 방도원씨의 특지와 향유 제씨의 협조로 전교 김우영씨가 앞장서 주시한 것을 알겠다. 효는 행실의 근본이요 충은 나라 사랑의 실천이라. 공은 조상을 빛나게 하고 이 고장을 명예롭게 하였도다. 그것을 밝혀 한 조각 돌에 새기니 사람들이 충효를 거울로 삼으리라. 1979년 을미 3월 1일 부산대학교 교수 진성 이동영 짓고 족 후손 정기 쓰고 의병장 청헌 신운석공 순국기념비 건립위원회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