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page


96page

박주억 선생의 집의 주소는 석보면 답곡리 639인데, 여러 집에 걸쳐있는 주소이다. 박주억은 경북 영양(英陽) 사람이다. 그는 1927년 6월 조선청년총동맹(朝鮮靑年總同盟) 산하 영양청년동맹의 석보지부(石保支部) 집행위원과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新幹會)의 영양지회(英陽支會) 집행위원을 지냈다.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거족적인 항일독립운동으로 발전하고 있던 1930년 2월 8일 그는이태을(李太乙)·박수봉(朴壽奉)·이돌몽(李乭蒙) 등의 동지와 함께 영양청년동맹의 석보지부회관에서 모임을 갖고 국내정세와 독립운동의 방안에 관하여 논의하였다. 이들은 이 자리에서 일제의 총독정치는 한민족을 억압하여 자유를 구속하고 있다고 규정하였다. 또한 현재 광주학생운동의 양상을 볼 때 일제가 한국인 학생만을 구속하거나 퇴학처분하고 있으며 광주는 물론 전국에서 학생과 민중들이 함께 궐기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으므로 석보면에서도 만세시위운동을 펴야한다는데 뜻을 함께 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동년 2월 11일 석보면 원리동(院里洞)의 장날을 이용하여 거사하기로 하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일제의 총독정치를 반대하는 격문 8백여매를 인쇄하여 거사 당일 장터에서 2백여명의 군중에게 배포하고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는 이일로 인하여 일경에 피체되어 1930년 4월 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