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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현팔(吳鉉八, 1895-1972) 목사는 자가 여경(呂卿)이며, 호는 호암(虎巖)인데, 본적은 경상북도 영양군 영양읍이다. 연희전문학교를 1919년 3월에 졸업한 최상현 목사보다 4년 늦은 1923년에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를 졸업하고 목사안수를 받았다. 1913년 9월부터 의성인 김원교, 청송인 윤용암 등과 항일모의 군사훈련을 시작하였고, 1915년 2월에 광복단 본부 밀사로부터 경북도책 간부 및 영양군책에 임명되어 민족정신 고취 밀명을 받아 활약하였으며, 1919년 2월에 교회를 영양읍 서부동에 창립하였다. 같은 해 3월에는 독립만세운동 밀령을 받아 영양읍 현동 앞 시골에서 시위하였고, 이후 월남 이상재, 민세 안재홍 등 재경인사와 남정석 등과 항일운동단체를 조직하여 영양군 청기면 및 영양읍 시장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하다가 영양경찰서에 체포 구금되었다. 같은 해 10월 광복단 밀사이자 상해임정 밀사인 영해사람 이겸호 등과 연락하여 극비리에 소총 등 50여점을 들여왔으며, 본군 석보면 포산리에서 만세운동 중에 군중에게 발포하던 왜경 및 헌병들에게 호암 오현팔 목사의 매부인 안성룡 외 2명이 전사하였다. 그 사건으로 인하여 구금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 특히 1930년 1월 조선일보, 동아일보, 시대일보 등에 민족단결과 항일애국운동에 관한 시론(詩論) 논문을 게재하여 그 필화(筆禍)로 경상북도 경찰부에 체포 구금된 일이 있었다. 그 후 굴원동지회라고도 하는 오오회(五五會)를 권국찬(權國燦), 이철호(李喆浩), 주원술(朱元述), 조훈석(趙薰錫)과 함께 조직하였고, 오오회를 일방만우회(一方晩友會)로 확대하여 항일독립에 노력하는 한편, 국산품 장려운동과 일제의 농지매입을 반대하는 연사로 활약하면서 애국심을 고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