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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를 높이 또 높이 외쳤다. 사방에서 모인 일천군중은 식민지 관공서를 향해 시위했는데 그때 인암 오봉승 공이 시위군중을 지휘했다. 일본 경찰에 길이 막혀 장터시위에 참가하지 못한 입암면민은 신사동 뒷동산에 올라가 만세를 고창하였다. 입암 시위에는 이원오 지사의 노력이 컸다. 시위 중에 검거 선풍이 불어 감옥에 갇힌 이가 167명이나 되었다. 그 많은 인원이 악명높은 태형을 받아야 했다. 식민지 조선의 농민은 다시 울어야 했다. 울다가 독립운동의 새길을 찾아 만주로 가고 해외로 나갔다. 물과공은 대구와 서대문감옥으로 끌려다니며 고초를 겪었는데 옥중에서 음설록을 저술하여 독립의지와 민족정기를 자랑하였다. 백민의 아름다운 고집이 아니더냐, 아름다운 고집은 해방 전야에 창씨개명 반대투쟁을 만들어냈다. 일본이 민족말살정책으로 창씨개명을 강요할 때 끝까지 굽히지 않고 성과 이름을 지켜낸 것이다. 국가에서는 영양삼일운동을 주도하고 창씨개명을 앞장서서 거부한 오석준 오윤승 이강욱 유동수 공에게 건국훈장을 추서하였다. 여기를 지나는 길손들이여. 의인의 예던 길목에서 무엇을 생각하는가. 먼저 인간의 길과 고집의 멋을 생각하자. 명리에 밝은 현대인들이여 이 정석 앞에서 사직하게 살던 삶의 미학을 그려보자. 천하를 정복할 북벌군을 일으키고 의병전쟁을 일으키고 3.1운동을 일으키고 창씨개명 반대투쟁을 전개한 선인의 큰눈과 큰마음을 배워 고향을 살아있는 역사의 고장으로 만들자. 2002년 8월 15일 문학박사 조동걸 삼가짓고 탑 표제 정찬벽 삼가 쓰다. 이 탑과 비는 보훈처, 경상북도와 영양군의 후원으로 대구 보경석재 공예사에서 조각하고 3.의거 기념탑건립추진위원회가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