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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一義擧 紀念碑(3.1의거 기념비) 이곳 청기는 고래로 의향이다. 태백산 남쪽에 영산을 만들때 일월산과 청량산을 세웠는데 영봉으로는 근역에서 으뜸이라 두 영봉의 정기가 하나로 모인 곳이 청기고을이다. 그래서 고인들은 두류봉 기슭에 자리잡고 청계수와 더불어 풍류를 읊다가 부용봉 천일봉 미양봉 너머로 푸른꿈을 띄웠다. 그러다가 역사의 소용돌이에 몸을 던졌다. 청기에 돈세 입향한 안동권씨 김녕김씨 경주김씨 순흥안씨 야성정씨 함양오씨 능성구씨 세거설화에 그런 미담이 살아있다. 역사에서 돈세가 미덕인 경우는 병자국치 때가 대표적인데 1636년 병자국치 때 청기에서는 은둔인사가 북벌군을 일으켜 양성했으므로 일반 돈세와는 달랐다. 그때 영양의 용계 오흡공 삼형제가 은둔할새 우재 오익공과 취수당 오연공 형제는 청기로 은신하여 북벌군을 일으킨 것이다. 공들은 임진왜란 때 선무공신에 오른 문월공의 아들이다. 동생 오연공은 병자호란 때도 전공을 세워 함양문중은 양란공신의 가문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럴때 효종의 북벌계획이 발표되고 서울에서 북벌군을 일으키자 청기에서도 북벌군을 일으켰는데 초동마을에 남아있는 사명대비와 대명동 각석과 군막지 노송이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불벌계획은 청나라를 정벌하여 천하를 재편하려던 꿈이었는데 그것을 청기에서 추진하였으니 다시없는 광영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원대한 웅도를 효종조가 끝나면서 단념하고 말았다. 북벌의 꿈에 부풀었던 오연공은 실망한 나머지 취수로 여생을 보냈다. 그 파격에 숨겨진 충절을 뉘라서 알랴만은 이창석 정석문 이석계 김표은 제공은 군유금세고인풍 또는 담시변구름생풍이라. 도인의 풍모와 영웅의 기상을 읊고 기렸다. 그런 기상을 물려받은 청기인이므로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을 받았을때 삼천리 강산을 피로 물들인 의병전쟁을 일으켰고 또 삼일운동으로 민족청사를 빛냈다. 의병전쟁에서는 김상진 김계현 김용흠 유재충등 구한국의 사직과 함께 산화한 지사가 무수하였다. 소청리에 검단산성을 쌓고 항전했던 벽산 김도현 의진은 명성황후 시해에 항거하여 봉기한 전기의병 가운데 최장기간 항전하여 독립운동사에서 남다른 각광을 받고 있다. 벽산께서는 1914년에 도해로 자결 순국하여 죽음으로 의리를 부활시킨 선비의 값진 최후를 역사에 남겼다. 삼일운동도 그러한 의리의 산물이었다. 영양삼일운동은 청기삼일의거에서 발원했는데 처음에는 우재 9세손 물와 오석준이 종질 유승공과 함께 추진한 망곡례로 시작되었다. 망곡례는 독살당한 광무황제의 인산일에 거행되었다. 백립을 쓰고 백립이 없었으면 갓 위에 흰천을 붙이고 북향사배하고 통곡했다. 그런데 북망통곡으로 설분될 수는 없었다. 그때에 이강욱 홍종률 유동수 등의 인사를 통해 안동지방 삼일운동과 3월 21일 임동주재소를 박살내며 시위한 책거리장터의 운동소식을 듣고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청계정과 윤승공택에서 태극기와 만세기를 만들며 은밀히 추진하였다. 만세기로서 「조선독립만세」라는 대형기를 제작하고 태극기는 수기 수백매를 만들었다. 드디어 1919년 3월 24일 오후에 징과 꽹과리를 울리며 마을에서 만세 시위를 일으켰다. 오석태 진승 세걸 승각 세박 석수 재승 등의 인사가 만세꾼을 모았다. 군중은 1911년부터 1918년까지 8년간에 걸쳐 농민의 경작권과 입회권을 무시하고 개간권과 도지권을 짓밟은 토지조사사업을 강행하고 각종 세금을 신설하여 농가를 괴롭힌 면사무소를 때려 부셨다. 그래도 분풀이가 되지 않았다. 이튿날엔 팔수골을 넘어 영양읍으로 돌진하였다. 양력 25일은 음력 24일 장날이라 장꾼과 어울려 영양읍 삼일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삼베바뿌재에 보리밥 도시락을 싸든 만세꾼은 입암면민이 앞선 장꾼과 합류하여 조선독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