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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규 선생은, 본관은 재령(載寧)으로 경상북도 영양(英陽) 출신이다. 이현규는 어려서부터 기품이 늠름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투철하였던 바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늑결되자 통분을 참지 못하고 부근의 동지들과 협의하며 각지로 연락을 취하여 11월 하순경에 청송(靑松)의 주왕사(周王寺)에서 동지 수십 명과 더불어 회합하여 적을 토벌할 것을 결의하고 여러 군(郡)과 읍에 격문을 보내 거의(擧義)의 뜻을 전했다. 그 해 12월 중순에는 울진의 불영사(佛影寺)에서 안동(安東), 청송, 진보(眞宝), 영양 등의 지역으로부터 모여든 동지들과 의병을 일으켰는데, 중의(衆議)에 의해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이어 격문을 발송하고 의병, 무기, 군자금 등을 모집하니 500여명이 의병에 투신하여 왔으므로 이들을 주왕산(周王山)과 청량산(淸涼山) 등에서 훈련시킨 뒤 이듬해인 1906년 2월에 의진(義陣)을 편성하였다. 아울러 유시연(柳時淵)을 중군장(中軍將)에, 신형일(申衡一)을 소모장(召募將)에, 김대규(金大圭)를 도포장(都砲將)에, 권대성(權大聲)을 집사(執事)에 각각 임명하고 전투태세를 갖추어 진격하여 일본군과 수십 차에 걸쳐 교전(交戰)하였다. 그 해 4월에 진보 근처 "오누지(池)"가에서 강원, 경상도 의병의 소탕책임자인 일본 헌병 오장(伍長) 무등(武藤)이 이끄는 헌병부대와 교전하였는데 치열한 전투 끝에 일본군이 패하여 달아나니 의병진을 이끌고 파천면(巴川面) 어천(漁川)까지 추격해서 대장 이하 적군 수명을 사살하였다. 이 전투에서 의병장인 이한규는 심한 상처를 입고도 다시 의병을 정비한 수 5월에는 울진(蔚珍) 죽변에 있는 왜관(倭館)을 격파하고 이어 영양의 북쪽에 주둔한 적군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이 증원부대를 이끌고 대대적으로 공격하였는데 악전고투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도포장을 비롯 많은 의병을 상실하였다. 그리하여 의병진을 수습하여 후퇴한 후 재기(再起)를 약속하고 해산하였다. 이처럼 독립 의진으로서 활약하는 한편 신돌석(申乭石) 의진과 연합하여 그 돌격장으로 활약하여 영해(寧海) 성을 함락하는 크나큰 공헌을 세우기도 하였다. 즉 왜적이 한국 관병들을 움직여 강원도 평해(平海)를 진공하였으므로 의진은 평해를 철수한 후 많은 의병을 거느리고 영해(寧海)를 수복하기 위해 진공하였다. 그러나 적이 이미 들어와 성에 총혈(銃穴)을 뚫고 대비하고 있었다. 이때 선봉장의 임무를 맡은 이현규는 서문을 파괴하고 불을 질렀다. 이로써 의진은 과감하게 진격할 수 있었고 적은 궤주하였다. 그 후에는 영일군 청하면 모진리(牟津里)에 피신하여 상처를 치료하면서도 글방에서 2세 교육에 주력하는 한편 항일구국사상을 고취시키며 재기를 도모하였지만 총상으로 인한 여독으로 1917년 2월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자료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