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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현 선생은, 경북 영양(英陽) 사람이다. 19세때 영양군 석보면(石保面) 김영주(金永周)에게 출가하였다. 출가한지 6년후인 1895년에 부군이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다가 전사하니 그녀는 삼대독자인 유복자를 기르며 시부모를 봉양(奉養)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적극적으로 만세운동에 참가한 후 동년 3월 9일 만주로 망명하여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참가하여 활약하는 한편 각 독립운동 단체와 군사기관 및 농촌등을 순회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동만(東滿)일대 12곳에 예배당을 세우고 10여 곳에 여자교육회(女子敎育會)를 설립하여 여성계몽과 해방운동에 성심을 다하였다. 또한 남만(南滿)각지를 순회하면서 동지들간의 불화를 화해시키는데 적극적으로 노력하였고 독립운동 군자금 모금에도 힘을 다하였다. 1925년에는 채찬(蔡燦 : 白狂雲)·이청산(李靑山) 등과 함께 일제총독 재등실(齋藤實)을 암살하기로 결의하고 서울 혜화동 28번지 고(高)씨댁에 근거를 두고 거사를 계획하다가 미수에 그치자 삼엄한 경계망을 돌파하고 만주로 돌아갔다. 마침 그때 길림주민회장(吉林住民會長) 이규동(李圭東), 의성단장(義成團長) 편강열(片康烈), 양기탁(梁起鐸)·손일민(孫一民) 등이 주동이 되어 재만 독립운동단체의 통일을 발기하자 그녀는 이에 적극 참가하여 통합에 큰 공헌을 하였다. 1928년에는 길림에서 김동삼(金東三)·안창호(安昌浩)외 47인이 중국경찰에 잡히게 되자 감옥까지 따라가서 지성으로 옥바라지를 하였으며 그 석방에 노력하였다. 1931년 10월에 김동삼이 「하얼빈」에서 체포되자 김동삼의 친척을 가장하고 일본영사관에서 여러 동지에게 중요한 연락을 취하고 김동삼이 국내로 호송될 때 탈환을 계획하였으나 시일이 촉박하여 성공하지 못하였다. 1932년 9월에는 국제연맹 조사단 「릿톤」경이 「하얼빈」에 조사를 왔을 때 왼손 무명지 두마디를 잘라서 흰수건에 「韓國獨立願」이란 혈서를 써서 자른 손가락을 싸가지고 조사단에게 보내어 우리의 독립정신을 국제연맹에 호소하였다. 1933년에는 여러 동지들과 함께 일본대사관 무등신의(武藤信義)를 격살(擊殺)할 것을 계획하고 만주 건국일인 3월 1일을 기다렸다. 그녀는 동지와의 연락 및 무기운반 차 「하얼빈」에 가서 2월 27일 중국걸인 노파로 변장하고 무기와 폭탄을 운반하다가 「하얼빈」교외 정양가(正陽街)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일본영사관에 구금되어 여섯달동안 혹형을 받아오다가 그해 8월부터 단식항쟁을 시작하였다. 그후 15일만에 사경에 이르자 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지느니라」라는 말을 남기고 1933년 8월 22일 순국하여 「하얼빈」 남강(南崗) 외국인묘에 안장되었다.(1967년 서울현충원 이장) 정부에서는 그녀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 출처 :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유공자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