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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탁으로 국운은 쇄퇴일로를 걷고 있을제 공은 은든생활을 결심하여 부리던 노비를 모두 풀어주고 청송 보현산아래 소먹이재를 찾아 여생을 보내고져 자리를 잡고 스스로 목산이라 호를하였다. 그러나 1919년(기미년) 망국의 한을 드디어 민족의 울분이 되어 터졌으니 공도 분연히 일어나 동지 조병국, 신태휴와 함께 격문을 돌려 3월 26일 화육장날을 이용하여 일제항거의 독립만세운동을 일으켰으니 수백명의 군중이 공을 따라 노도와 같이 일어났다. 공은 왜경에 잡혀 3년형에 옥고를 치르면서도 의연하게 도해시로 그의 굳은 의지를 보였으니 원래 의리만을 숭상하든 사람이 어찌 하여 하루아침에 오랑캐의 백성이 된단말인가? 하늘의 해도 빛을 잃은 어두운 이땅에서 내 차라리 바다를 밟은지언정 그의 신하는 되지않켔노라 이라 하였으니 꺽지못할 공의 기개와 늠름한 기상을 엿볼수 있다. 일본제국주의 침략에 더렵혀진 이 강토에서 살아가기엔 공의 지조는 너무나 맑고 깻끗하였으니 드디어는 1922년 음력 2월 19일 이른 새벽 망국의 통한을 큰소리로 외치고 이곳 가마소에 몸을 던져 63세를 일기로 장엄히 일생을 끝마치셨다. 광복후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3.1절에 공을 독립유공자로 수훈하였고 또 청송군민은 성금을 모아 1954년 이곳에 공의 순절비를 신현돈 경북지사의 글로 세웠는데 도로공자로 인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