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page


300page

방포여뢰(方袍如雷)하고 비환여우(飛丸如雨)한데 본진은 후방에서 공격하고 利川(이천)과 義城(의성)의진은 전방을 막아 삼진이 합세 적병 칠,팔인을 사살 전과 후 일몰하여 하산 퇴각 玉峴(옥현)에 유진하니 적들이 감은촌(甘隱村)을 방화하여 참상은 형언할 수 없이 한 마을이 겨우 육,칠 가구만 남았다는 전화(戰禍)는 1896 병신년 4월 초 2일(양 5월 14일) 청송의진의 진중일기인 적원일기(赤猿日記)에서 밝혀진 항일의병 감은리 전투 현장의 참혹한 사실의 기록인 즉, 때는 120년 전 이웃나라 日本(일본)이 우리나라 대한제국(大韓帝國)(고종 31년)의 국권이 비세(非勢)하여 1894년 동학란이 일어나자 평정에 도움을 주겠다는 빌미로 파병하여 앞서 주둔하고 있던 청(淸)나라와 전쟁을 유발 승리하게 되자 그 기세를 몰아 우리나라의 국권 찬탈을 노골화하면서 국정을 농단(壟斷)하다. 드디어는 1895년 8월 20일 국모인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하고 단발령을 내리는 야만적인 을미만행으로 전국 각지에서 분기(奮起)한 의병들이 창기(倡起)할 때 우리 청송에서도 "나라가 어려움에 처한 난을 당했을 때면 의병(義兵)을 일으켜야 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도리이거늘 따르고 따르지 않는 것은 충신과 역적임을 스스로드러나게 하는 것인데 향회의 모임에 한 번이라도 참여치 않음은 부모에 대한 의리(義理)를 저버리는 짐승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니 과연 옳은 일이라 할 수 있겠는가? 엎드려 바라옵건데 여러 첨존은 밤을 새워서라도 달려와 거의(擧義) 도모를 함께 하기 바라노라."라는 위국거의(爲國擧義) 자수지계(自守之計)와 춘추대의(春秋大義)를 명분으로 효유(曉諭) 창의(倡義)하였던 의진(義陣)으로서 경기도 이천의 김하락(金河洛)의 진과 의성의 김상종(金象鍾) 의진이 우리 청송의 심성지(沈誠之) 의진과 함께 삼개 지역 의진이 승전(勝戰)한 한말 항일의병사의 청사(靑史)에 길이 남을 전사(戰史)임에도 널리 알려져 있지 못한 안타까운 사적(史的)이라 만시지탄은 있으나 丙申倡義(병신창의) 靑松義兵(청송의병)의 倡義(창의) 120주년이 되는 二甲周年(2갑주년)을 맞이하여 (사)의병정신 선양 청송지회의 발의에 의해 청송군민의 성력으로 항일의병 감은리 전투 전적 기념비를 건립하여 이천의진과 의성의진에 대한 감사와 함께 감은리 전투 참전 삼개 의진 의병선열들의 국권수호를 위한 자발헌신(自發獻身) 호국정신(護國精神)인 의병정신(義兵精神)을 위무 추모하면서 항일 의병사에 길이 남을 중요 전투 전적지로 영원히 기념하고자 하노라. 2016년 5월 14일 건립 청송군수 (사)의병정신 선양 경북지부 청송지회 지회장 달성 서점 근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