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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군사열전 청송독립운동사 국사 편찬위원회 공훈록 대구 망우공원 항일운동 기념탑에 등재되었고 당대의 한학자로서 후진을 양성하는데 전념하였으며 선생의 유고집이 남아있다. 선생이 42세 되던 1895년 을미사변으로 국모가 시해되는 등 국내외 정세는 일본의 간교한 침략행위가 노골화되자 전국각지에서 사림이 중심이 된 창의가 일어나 일제에 항거하는 구국투쟁이 일어나고 있었으니 청송에서도 1896년(병신)에 사"를 지어 비장하고 결의에찬 창의선서를 하였으니 이는 오늘날 어느 국가의 국방총챙도 표현하기 어려운 명문으로 "국난을 당하여 간절한 밀지가 내려지니 신민들이 감읍하여 먹던 밥을 토하고 피를 토할 일이니 칼날을 밟으라 한들 마다할 수 없는 일로서 화를 자초하지 말 것"이라는 결연한 창서사를 등단 선언 후 용진천 백사장에서 의병훈련을 시작할 당시 선생을 비롯한 청송유림선열들이 나라를 걱정하고 고장을 지키겠다는 그 용기와 충정은 오늘에 사는 후손들로서는 그 정신과 기개가 참으로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하겠다. 용진천 백사장에서의 의병훈련은 한말관군의 군대훈련을 본사람도 없어 한양을 출입하며 남대문 밖 관군의 훈련 상황을 구경한 보부상낭인의 조언으로 훈련을 시작하였다하니 병신창의 청송의진의 승패전적을 논하는 차원보다 오직 당시 선생을 비롯한 청송유림 82 현 선열의 우국애향 선비정신에 감격할 뿐이며 일제 36년간 국권을 상실하고 식민생활을 거치면서 1945년 2차 대전후 조국광복과 독립운동에까지 그 정신이 밑거름이 되었다는 엄연한 사실을 보시지 못한 채 1927년(정묘) 9월12일로 타개하시니 향년 73세였다. 그로부터 110여년이 흘러 국가는 2005년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 행사에서 선생에게 대한민국 건국공로 서훈으로 "국국포장"을 추서하였기에 유족들의 결의를 모아 증손 숭조씨가 적원일기 병신창의 등 유족회관련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