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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산(重山) 허종(許鍾, 1883~1949)은 허훈의 장자인 허숙의 아들이다. 조부 허훈에게 글을 배웠고, 외조부 이진상(李震相)의 촉망을 받았다. 허종은 천성이 활협(?俠)하고 의협심이 강했다. 허종은 종조부 허겸과 같이 신민회의 회원으로 가입하여 대구에서 활동하였다. 신민회는 1907년 4월 초 안창호가 발기하여 양기탁·전덕기·이동휘·이동녕·이갑·유동열·안창호 등 7인의 창립위원으로 조직된 비밀 결사였다. 대구는 신민회의 거점 도시였고, 그 조직은 경상북도 지역까지 발전하고 있었다. 1920년을 전후로 대구에서 거주하던 허종은 김응섭(金應燮)·김시현(金時鉉)·허규(許珪)·한양이(韓良履)·이원기(李源祺)·양한위(梁漢緯)·이원일(李源一)·김동진(金東鎭) 등과 교유하며 시국의 정보를 교환하였다. 그 중에서 허규(許珪)는 재종숙이었고, 이원기(李源祺)·이원일(李源一)·이원록(李源祿, 陸史) 등은 재종고종이었다. 허종은 1920년 9월 결성된 조선독립운동후원의용단에 가입하여 서로군정서의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1922년 12월 체포되어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조선독립운동후원의용단의 김찬규(金燦奎)·신태식(申泰植)·이응수(李應洙) 등은 재외 독립운동단체와 서로 호응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경상도 일원을 중심으로 단원의 규합과 군자금의 모집을 추진하던 중 체포되었을 때 허종도 체포되었던 것이다. 허종은 청송 광덕에서 수리 간척으로 전장을 경영하였고, 대서업(代書業)과 운송업을 겸해서 사업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허종의 창의성과 사업적 자질은 조부 허훈의 실학적 정신을 계승한 것이기도 했다. 허종은 1945년 조국의 광복을 맞이하였으나 안정을 얻지 못하고 1949년 6월 사망하였다. 그의 아들은 대구시장을 역임한 허흡(許洽)이다. 출처 : 한국향토문화 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