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page


20page

1906년 3월 청송 주왕사에서 50여 동지를 모아 산남의진에 들어가니 이 진은 고종황제의 밀지를 받들은 시종경 정연직선생의 뜻으로 기자 연기 장군이 영천고을에서 영남의병을 연합한 수천대군의 본영이다. 타고난 절색의 기백은 나라사랑의 불꽃이 되어 의여가 출중하자 각읍을 점거한 왜적을 향해 노도와 같이 동해안 천리를 치달리면서 비호처럼 적도를 휘몰아치니 가는곳 마다 그들의 소굴은 무너지고 승전의 함성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그러나 기둥 하나로 바치기엔 큰 집이 너무 기울었다. 1907년 7월 19일 청하군 옥계 접전에서 총상을 입고 잡히었으니 나라의 간성이 무너졌다. 왜법정에서 효유하는 적을 통매하며 대한장부의 열을 남기고 1907년 9월 15일 30세를 일기로 대구옥에서 순국하니 아! 호국의 거성은 사라졌다. 온 겨레의 슬픔이 사무쳐 하늘은 빛을 잃고 산과 물도 노여워서 울부짖었다. 배 월성박주익의 따님은 왜적에 쫒기면서 손수 부군을 이곳에 봉장하고 망명의 한난길에 가시어 희리골에 고이모셨다. 슬하 위록, 점용 두 아들도 어버이가시고 나라 망하자 격랑속에 조졸했으나 위록후에 길랑, 잠용후에 상광, 상만, 영길, 상활, 상홍및 녀 백태출은 모두 광복한 새 조국에 살아 상광의 자 지환등 증손도 많으나 유로 약한다. 가신지 일흔한돌 1977년 12월 13일 건국훈장 국민장 제537호가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