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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우러져 친일파로 인하여 을사조약이 맺어져 국권이 송두리 채 빼앗기자 이를 본 도찰사 정환직 선생이 고종황제의 밀지를 받아 장자 정용기를 영남에 파견하여 영천에서 산남 의진이 창군된다는 소식을 접하자 국운은 항쟁의 성패에 달려있다 하며 내가 갈 길은 바로 여기에 있도다 하고 전재국 수국과 더불어 의진으로 달려가서 단하에 사맹하고 입지나여 병력모집 및군자금을 모금하였으며 일방으로 월정곡에서 화약을 제조하여 의군에 보급하는 등 다방면의 창군활동을 하였다. 항쟁으로 들어가자 항상 진두에서 활약하여 청하읍 전투 흥해읍 전투에서 대승하고 영천 자양면 전투에서는 왜장을 사살하였다. 신녕과 의흥 의성 등지의 주둔왜군을 습격하고 안덕 신성에 래습한 왜적을 격퇴하였다. 그 후 영일 죽장 매호리에 유진중에 습격해온 왜적들과 입암에서 접전 중 불행히도 정용기 대장 이하 제장들이 전사하므로 파진되었으나 도찰사 정환직직 선생이 재거하여 친히 의진을 영도하자 운주산 전투 파계산 전투 비학산 전투 조천전투 달성 전투 등지에서는 선봉장을 맡아 활약하였다. 그 후 청송 서부진에 배속받아 의성지방을 이진중 왜적들의 총 공세로 퇴로를 차단 당하여 고전하자 부하 40여명을 지휘하여 포위망을 벗어나게 하고 자신은 체포되어 대구 옥에 투옥 된 후 왜적들의 만단유설을 뿌리치고 1909년 3월 4일 대구지법에서 소위 강도죄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고등법원에 항소하자 동년 4월 8일 항소를 기각하고 사형으로 형을 변경하여 6일 복중에 참수 순국하하였다. 이 비보를 접하자 김재원 재사 진효 등이 대구 형장에 가서 처형당한 시신 중 출전전에 부인께서 표시해 둔 옷을 보고 수 없는 시신을 찾아 3일낮 3일밤을 솔가지를 꺽어 파리떼를 쫓으며 운구하여 향목으로 수를 제작 합신하여 월정리 산 2031번지 화전곡 임좌원에 안치하였다. 배위 파평윤씨도 왜적들의 고문 여독으로 1911년 5월 생을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