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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이 하도 극진하여 어머니 편찮을 때 날아가던 매가 꿩을 떨어뜨려 약에 쓰이도록 하였고 또 한번 어머니 병환에 구해도 없던 오계가 저절로 걸어들어왔으며 천 리 먼 땅 한양에서 꿈으로 부친의 위독함을 느껴 밤낮없이 길을 재촉하여 돌아왔으니 하늘이 아는 효성이라 하였다. 1894년에는 데리고 있던 노비들에게 논밭을 나누어 주고 해방시켰으니 역사의 흐름에 앞선 만인 평등의 어진 마음이 아닌가 왜적의 침략이 심해지자 보현산 깊은 골짜기 현서 수락동에 숨어들어 스스로 소먹이고 나무하여 목사이라 일컬었다. 농사짓기를 연구하며 산을 가꾸고 과실나무를 많이 심어 다 함께 잘 사는 길을 찾았고 원근의 젊은 이들을 모아 글을 가르치고 착하게 이끌었다. 나라 잃은 설움을 뼈골에 새기고 겨레 위해 주지 못해 한 이더니 3.1의거의 봉화가 타오르자 분연히 일어섰다. 동지 조병국 신대휴와 함께 격문을 돌려 1919년 3월 26일 수백 명 군중이 이 곳 화목장터에서 원수에게 항거하는 만세를 외쳤고 독립을 부르짖는 깃발이 노도를 이루었다. 왜경에게 달려들어 주동자는 바로 내라고 꾸짖어 서릿발 같은 기품을 보였다. 이튿날 27일에 동지 조병국이 뒤를 이어 또 한차례 이 장터에서 민족의 정기를 떨치었다. 두 해의 옥고를 겪은 뒤 1922년 2월 19일 새벽 수락동 가마소 깊은 물에 몸을 던져 예순 세해로 광복의 한 맺힌 이승을 버리었다. 장한 기백 보현산에 울리고 맑은 절개 낙동강에 여울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