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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조약이 늑결되고 일제의 간섭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자 일본인을 한반도로부터 축출하기 위하여 의병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이때 영천 사람인 정용기(鄭鏞基)가 영천을 중심으로 이한구(李韓久)·정순기(鄭純基)·손영각(孫永珏) 등과 더불어 거사계획을 확정하고 있었다. 정용기 등은 국문으로 권세가(勸世歌)를 지어 민중들에게 돌려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한편 통유문(通諭文)·격려문을 각계 각층으로 보내어 의병에 입대할 것을 권유하였다. 정용기 의진에는 이규필(李圭弼)·백남신(白南信)·정완성(鄭完成)·최기보(崔基輔)·최치환(崔致煥)·정진학(鄭鎭鶴)·정대하(丁大廈)·이창송(李蒼松) 등이 조직확대에 주력하고 있었다. 이들의 활약으로 각 지방별 모병 담당자가 구성되었다. 이때 남석인은 서종락(徐鍾洛)·남석구(南錫球)·임중호(林中虎)·심일지(沈一之)와 함께 청송지역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남석인은 영천으로 정용기를 방문하였는데, 이미 정용기는 기밀이 누설되어 체포된 후였다. 다만 정용기의 사촌인 정사홍(鄭士弘)이 의병 30명을 거느리고 있을 뿐이었다. 다시 거사준비를 하여 남석인은 정사홍과 경주 사람 이운경(李雲景)·흥해 사람 정천여(鄭千汝) 그리고 청송 사람으로서 남석인의 육촌 되는 남석문(南錫文) 등과 함께 1906년 음력 4월 12일 출전하였다. 무기로는 각기 화승총 25자루를 휴대하였을 따름이다. 4월 13일 경주 하옥동(下玉洞)에 도착하고 이어서 영덕 청련사(靑蓮寺)로 들어갔다. 여기에는 이미 경주 사람 이한주(李漢主)가 의병 30명을 거느리고 와서 절에 머물러 있었다. 본래 이한주는 정용기 의진의 중군이었으므로 합진할 것을 결정하고 부서를 다시 정하였다. 이때 남석인은 포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남석문은 좌익장, 정사홍은 우익장, 정천여는 소모장, 이한주는 중군으로 임명되었다. 의진을 정비한 후 4월 26일에 의병 80명을 거느리고 경주로 향하였다. 그날 정오에 영덕 적암지(赤巖地)에 이르렀을 때 경주 진위대 병정 30명이 총을 쏘며 내습해 왔다. 역부족으로 의진을 해산하고 옥동(玉洞)으로 돌아와서 나머지 병사들을 타일러 해산시키고 다음날을 기약하였다. 일시 영천의 김성찬(金聖贊)의 집에서 두 달여 간 머물다가 8월초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한편 부친 동엄 정환직(東 鄭煥直)의 주선으로 대구 경무청으로부터 풀려나게 된 정용기는 의거준비를 시작하였다. 1907년 5월 이들은 강원도 강릉에서 의거할 것을 결의하고 무기 등을 준비하였다. 기일이 다되자 정사홍이 남석인을 찾아와 창의할 것을 권유하였다. 남석인은 군사 30명을 모집하여 영천 거동사(巨洞寺)에 머물면서 의병장 정용기를 청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남석인은 의진을 거느리고 청송·흥해 등지의 민가를 다니면서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6월 정사홍과 뜻이 맞지 않으므로 포군 20명만을 거느리고 청송 보현산(普賢山)으로 들어가 유진하였다. 가을까지 그곳에서 유진할 생각이었으나 일군이 눈치채면 불리할까 염려하여 영덕 입암(立岩)으로 가서 포병을 모집하고자 청하(淸河) 하옥계(下玉溪)에 주둔하였다. 6월 19일 적의 공격을 받고 은신하여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20일 체포되고 말았다. 재판 결과 종신 징역에 처해졌으나, 끝내 대구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