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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청송에서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심성지는 1895년 을미사변의 변보를 전해듣고 비분강개하였는데, 이어서 일제와 친일정권에 의해 을미개혁으로 단발령까지 강행되자, 그것에 대한 반감이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그러던 중 1896년 정월에 안동의병진의 유시연이 포수 20여 명을 대동하고 청송으로 와 군기고를 습격하였으며, 외지에서는 거의 촉구 격문이 내도하였다. 이에 청송의 유생들은 향회를 개최하여 1896년 정월 29일 그를 의병장에 추대하였다. 그리고 2월 2일에는 참모와 서기 등 약간명의 간부진을 선출하였으며, 3일부터 인근 청년들을 모집하여 군사훈련을 실시하면서 사태의 추이를 살피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군사훈련을 하는 데 필요한 군량을 확보하는 일이었다. 이에 따라 5일에 모량도감을 설치하고 각 문중에 할당하여 군량미를 모았다. 그리고 9일 참모진을 구성하였는데, 김대락으로 중군장을 삼고, 남두희로 우익장을 삼았다. 10일에는 참모 남승철을 사병도총으로 삼았다. 그 후 대구에서 일본군이 의병을 토벌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4월 2일 심성지 의병장은 중군장 김대락에서 포정 60명을 이끌고 감은리의 뒷산을 지키도록 하였다. 그러나 적병들이 먼저 그곳을 점령하였으므로 청송·의성·영천의 3의병진이 연합하여 마을 앞에 진을 치고 적들의 공격을 막았다. 의병진은 치열하게 전투를 전개하여 적병 7,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고, 날이 저물자 적들은 퇴각하고 말았다. 이처럼 심성지 의병장이 이끄는 청송의병은 대승을 거두었으나, 광무황제의 의병 해산조칙이 내려짐에 따라 의병진을 해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