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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를수 없는 인품을 흠모하였다. 해공 신익희도 공을 가리켜 그와같이 대범한 인격을 갖춘이는 본일이 없다고 회고하였다. 1922년 항일운동연합전전체인 신간회 조직에 참여하고 도일하여 신간회 동경지회를 조직 이듬해 2월 임시대회에서 대의원에 선철되고 조헌영, 김진한에 이어 동경지회장을 역임하면서 홍보전단을 배포 시위중 체포되어 1년 옥고를 치뤘다. 1930년 대구 팔공산에서 광산을 위장 경영 애국지를 규합 군자금확보, 모군 운동을 하면서 박건이란 가명을 썼다. 1940년 안재홍, 김시현등과 모의하고 광복군 증강을 위해 국내청년들을 아들 희규와 김창숙아들 찬기를 대동하여 연안으로 밀파시켰다. 맏아들 희수는 학생만세운동으로 일경에 쫒기었고 둘째아들 희돈과 아우 진목도 구국운동대열에서 체포되어 대구감옥에 투옥되고 준목아두 또한 20여명의 동자와 지시만을 기다리게했다. 종교계 지도자들과 거액의 군자금을 모으고 만주 연안의 독립동맹군을 합세 중경임정과 미주의 독립운동단체들을 연결하고 대일 선전포고를 추진중 나라와 겨레를 좀먹는 배신자의 밀고로 노석호와 희규는 산해연에서 공과 김시현은 북경에서 체포되고 국내외 백여명의 지사들도 체포구금되니 슬프도다 하늘이여! 나라와 겨레의 한을 씻지못한채 1943년 9월 신영감옥에서 아들 희규를 앞세워 보내고 뒤따라 순국하니 향년 50세요 희규는 21세였다. 선생의 아버님 한철공은 백절불굴의 항쟁을 자랑스레 군자금을 지원하고 학교설립, 시장개설, 수리사업등 교향 발전에 많은 업적을 남겼으나 자손들의 투옥과 죽음앞에 끝내 조국광복을 보지 못한채 운명하니 이 어찌 공의 일문에만 슬픔이되랴! 부인은 성산이씨로 혹독한 탄압과 고통속에서도 일문을 지탱하고 효행과 부군의 군자금 모금, 자손들의 훈교에 전념하여 엄한 가풍을 세운 유가 태생의 현숙대담한 부인이었다. 공은 인도를 모르면 백사불성이란 부친의 교훈을 실천에 옮겨 자신을 나타내지 않았으며 동지들을 내몸같이 아끼니 주위가 이에 감화되었다. 정부에서는 공의 업적을 기려 1986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유골은 찾을길없어 섥단으로 선영하에 부인정자여사와 나란니 모시니 정해걸 군수의 지원과 일부성금으로 제현이 뜻을 모아 기념비를 세워 나라와 겨레사랑에 빛이되게 하려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