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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비분감개하여 책을 덮고 붓을 들던 손에 창검을 쥐고 구국성전에 궐기하였다. 충절과 의리로 투철히 교양된 공은 구국충절과 보향수족의 성전에 몸을 던지게 되었다. 계부 응주공을 모시고 아우 치화 치윤, 종제 치홍 치강 등 일족과 주민 100 여명을 모아 의병을 편성하여 총궐기를 선포하였다. 선비 권희순 김덕기 장춘우 손대효 제공도 참여하였다. 천연의 요새 건마산에 집결하여 성벽을 쌓고 식량등을 비축해 두고 결전에 임했다. 단을 만들어 하늘에 고하기를 '여기서 태어나고 여기서 자라 국왕의 옷을 입고 음식을 먹었으니 하루 아침에 섬나라 왜놈이 강산을 피로 물들였는데 어찌 나라에 보답지 않으리오. 차라리 죽을지언정 욕되지는 않겠노라.'하고 맹세하니 모든 의병들은 눈물을 흘리며 죽음으로 공을 따랐다. 7월에 들어 1일에 왜적의 선봉 400 여명이 샛길을 따라 후평들에 돌입하였다. 쇠북을 요란히 치고 창칼을 번득이며 마을로 들어 닥쳐 닥치는데로 죽이고 약탈하고 분탕을 지겼다. 이를 목격한 공은 성중에 군령을 내려 일제히 왜적을 공격하니 왜적은 혼비백산하여 깃발과 병기를 버리고 도망갔다. 우리 의병군은 많은 무기와 갑옷등을 노획했다. 도망갔던 왜적은 그 후에도 줄기찬 공격을 해왔다. 아군은 사기충전하여 견적필살의 공방전이 처절히 전개되었다. 첫날 전투에서 선봉장 안철수가 용감히 싸우다 왜적의 총탄에 쓰러졌다. 다음날 또다시 적들이 공격해 왔고 3일째 계속 적들을 격파하였다. 빛나는 승리였다. 4일 새벽에 왜적은 부근의 부대에서 원군을 얻어 대대적인 공격을 해왔다. 아군은 중과부적이요 고립무원이라 사력을 다하여 분전했으나 화살이 다하고 창칼이 모두 부러지자 적수공권 맨주먹과 돌로 대항하여 싸웠다. 치열한 전투는 격전에 격전을 거듭하여 왜적은 100 여명이 넘는 전사자를 내고 패퇴하였다. 아군은 크게 승리하였다. 이에 성문을 열고 패퇴하는 왜적을 추격해 나갔다. 그때 계곡에 숨어있던 왜적 복병이 졸지에 일어나 공격하니 아군은 혈전을 벌렸지만 힘이 다되어 쓰러져 갔다. 아우 치화 치윤, 계부 응주, 종제 치홍 치강 례로 장열히 전사했다. 공께서 의병들의 시체를 둘러보고 '싸움은 이길수 없지만 의는 욕되게 할 수 없노라, 하고 의관을 정제하고 북향재배한후 깍아지른 천척절벽 아래로 몸을 던져 장열하게 순국하였다. 노 서석으로부터이 소식을 전해들은 신씨부인도 부부의 도를 지켜 남편과 생사를 같이 한다하고 같은 곳에 올라 투신자살하였다. 몸종 복분과 노 서석도 통곡하며 상전을 따라 같이 죽었다. 부사어국하고 처사어부하며 비사어주로다. 백부 응하공도 '마땅히 죽을자리에 삶을 구함은 애오라지 대의를 그르칠 뿐이노라, 하고 자결하였으며 질 강의 처 권씨부인도 계곡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다. 이날 당내 건강한 종 10여명과 여종 6명도 주인의 비보에 놀라 통곡하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시종노의 처 옥금도 물에 투신하였다. 향리의 김덕기 손대효 박종연 이장춘 신광도 그리고 마을사람 안철수 조정원 장춘우 계우 형제 그리고 따르는자 100 여명도 끝까지 대항하다 옥쇄하였다. 장춘우의 어머니 유씨도 두아들의 비보를 듣고 목숨을 끊었으니 진실로 애석하도다. 그러나 권희순 공은 의성수장을 거쳐 장수현감을 역임하였다. 공의 이러한 의병활동과 그 일문의 삼강정신이 조정에 알려져 1609년(광해군 원년)에 정려를 내렸으니 비명에 '남자의 뜻 굽히지 않고 의로써 마치니 죽음이 아니로다, 라고 하였다. 지은이는 중추부사 매창 정사신이요, 쓴 이는 집의 운천 김용으로 모두 학봉 김성일 선생의 제자이다. 공의 삼강정신은 후대에 계승되어 1767년(영조 43년) 의성현령 서명?이 조령에 의해 선생의 분영을 개수하고 정려각의 현판을 중수한후 제사를 모셨다. 그후 공에게 정삼품의 판결사를 증직하였다. 공은 부인 신씨와 옥산면 국동 의사? 향무원에 합사하였다. 2남을 두었으니 성이요, 협이다. 성은 뜻밖에 양친을 잃은 후 한양 조영?의 따님 조씨부인과 조부에 대한 효행이 지극하여 20년간의 '?병기'가 ?락제문집에 전한다. 2남을 두었으니 석용과 석류요, 협은 1남을 두었으니 남도이다. 석용은 3남을 두었으니 정?요 명?요 수?이고 석류는 2남을 두었으니 ?요 학?이다. 남도는 2남을 두었으니 만걸이요 종걸이다. 현손이하는 다기록치 않으니 근래에 와서 가문에 충효정신이 이어졌으며 많은 인재가 배출되어 각계각처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음은 어찌 공의 ?덕이 아니리오. 아! 김문의 의열이여, 충효열 삼강이여, 천추에 빛나도다. 한국역사상 의성 김문 일족의 장열한 순국과 옥쇄는 매우 드문 일이다. 이 아니 빛나랴. 후대에 영원히 귀감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