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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가도를 빌미로 조총으로 무장하여 쳐들어온 임진왜란은 조선전국토를 초토화시켰다. 나약한 관군은 일시에 무너지고 국왕 선조는 도성을 버리고 의주로 피란하였다. 그러나 국가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각 고을의 선비들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벌떼처럼 의병으로 일어났다. 이때 의성김씨 가문에 위대한 민족의 두 위인이 있었으니 '무학봉이면 무의병이요. 무의병이면 무영남이라, 한 경상도 초유사 학봉 김성일 선생이요, 의성의 천고충신 김치중 선생이다. 공의 자는 정이이요 호는 학봉이며 의성인이다. 세상사람들은 의사라 불렀다. 의성김씨 시조 신라왕자 휘 석의 후손이며 오토산 진민사에 모셔저 있는 태자담사 휘 용비의 11대손이다. 흥왕사의 난때 순절한 문예부좌사 윤 휘 시권의 8대손이며 고려왕조가 망하자 망복지의로 안동으로 내려온 공조전서 휘 거두와 만호 휘 천의 7,6대손이다. 단종이 숙부 수양대군에게 양위하자 단종과 이종간으로써, 원사공 한계, 정랑공 한철, 충순위공 한석 등 형들과 함께 벼슬도 버리고 공부도 미루어 둔채 고향 안동으로 내려와 문을 닫고 불사이군의 충성을 지키며 자정한 부사직공파조 휘 한동의 현손이다. 증조 휘 만정은 부사맹이요, 조 휘 처선은 충순위요, 고 휘 응상은 참봉인데 퇴계이황선생의 제자로 이산서원의 유사를 지냈다. 비는 영양남씨 감찰 숭의 따님이다. 공은 충절과 의리 학문의 가문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터 기품이 준수하고 효우로 향내에 이름을 덜치고 성현의 학을 배우고 예의행검에 타의 모범이 되었다. 사람됨이 장중전아하여 제배의 경중을 받았고 집안의 사랑과 촉망을 받았다. 어려서 사종형 수일공에 나아가 사서삼경을 배우고, 장성하여서는 이종숙 서애 유성룡 선생의 제자가 되었다. 선생께서 공의 정대장중한 품성을 크게 사랑하고 칭송하였으며 후일 대성할 재목으로 기대하였다. 또한 선생은 공의 품성과 학식을 믿어 3남인 수암 유진을 맡겨 교육하도록 부탁까지 하였다. 공은 항상 '선비가 이 세상에 살면서 경전을 토론하고 의리를 밝혀야 하며 마땅히 우주간의 남자로 살면서 어찌 허송세월로 일생을 보내겠는가, 고하였다. 공은 평산 신구정공의 둘째 따님과 결혼하였다. 부인 신씨는 성품이 정숙하고도 단아하였으며 인자하고도 효성스럽고 지혜로왔다. 여러 사서를 섭렵하였으며 예의를 익히셧고 스스로 가법을 이루어 군자를 섬김에 덕을 어김이 없었다. 결혼후 안동부 서쪽 회곡리에 거주하면서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쓰고 있던 공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임진왜란의 소식이 전해졌다. 왜의 예신수길이 권력을 틀어잡고 조총으로 무장한 정예병 수십만명을 동원하여 조선정벌을 감행하였다. 임진년(1592) 4월 3일 부산포에 상륙한 왜군은 파죽지세로 왕경을 향하여 북상, 5월 2일에 한성을 점령하였다. 국왕 선조는 도성을 버리고 황급히 의주로 피난하였. 공은 풍전등화와 같은 나라의 운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