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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백 선생의 묘지는 현충원으로 이장되었지만, 그전의 묘비 위치를 이 마을 주민에게 물었다. 동네 입구 삼거리에 있었다. 박연백(朴淵伯)은 1905년 을사늑약 소식을 듣고, 사방으로 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집한 뒤 공산(孔山)에서 창의하였다. 그는 1906년 7월 1일 일본군과 교전하여 수십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 뒤 의성·의흥·영천·청송 등 여러 곳에서 야간기습과 화공전술을 펼치며 일본군과 맞섰다. 1907년에는 입암전투(立巖戰鬪)에 참여하여 치열하게 싸웠으나 대장 정용기를 비롯한 많은 의병이 전사하였다. 입암전투에서 패한 뒤 박연백은 의성군 춘산면 금동·공수동·유동 등지에서 일본군 토벌대와 접전을 벌이며 활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