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1page


351page

으로 무장하고 동지 200여 명과 함께 경북 울진군에서 의병활동을 하였으며 삼척군 죽변동 해안을 침범한 일본 선박을 공격하여 3인을 사살하고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동년 8월에 울진군 석호리와 삼척군에서 군자금을 모금하다가 피체(被逮)되었다. 1908년 10월 7일에 대구지방재판소(大邱地方裁判所)에서 교수형(絞首刑)을 언도(言渡)받고 공소(公訴)하였으나 1909년 2월 2일에 경성공소원(京城控訴院)과 동년 2월 17일에 대심원(大審院)에서 기각(棄却)되어 34세를 순국(殉國)하였다. 후사(後嗣)는 전하지 아니한다. 1991년에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功勳)을 기리어 건국훈장(建國勳章) 애국장(愛國章)을 추서(追敍)하였다. 선생의 선계(先系)는 고려(高麗) 검교상장군(檢校上將軍) 휘(諱) 존유(存裕)를 시조로 하며 7세조(世祖) 문절공(文節公) 송은선생(松隱先生) 휘(諱) 홍(鴻)은 고려의 사직(社稷)이 다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節義)를 지킨 두문동칠십이현(杜門洞七十二賢)의 한분이시다. 경상도 의성의 입향조는 9세조 의성군사공(義城郡事公) 휘(諱) 익령(益齡)이며 10세조 휘(諱) 장손(長孫)은 별시위(別侍衛)이다. 12세조 성천공(惺川公) 휘(諱) 건종(建宗)이 동면(同面)의 덕천(德川) 장리(長里)로 이거(移居)하여 자손들이 대대로 이곳에서 세거(世居)하였으니 선생의 12대 조이다. 부친은 휘(諱) 예조(禮祖)이고 모친은 의성김씨(義城金氏)이다. 2015년에 성천공의 중형(仲兄) 진사공(進士公) 휘(諱) 찬종(纘宗)의 후손 포두문중(浦頭門中) 자원(滋源) 종인(宗人)이 국가보훈처(國家報勳處)와 국가기록원(國家記錄院)에서 선생의 공적과 재판기록을 찾아 덕천문중 구진(具鎭) 회장께 전하였다. 이에 선생의 순국정신(殉國精神)을 기리기 위하여 문중에서 모금하고 경북북부보훈지청(慶北北部報勳支廳)과 협의하고 의성군(義城郡)의 지원을 받아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명(銘)을 하여 추모합니다. 나라가 풍전등화와 같을 때 구국(救國)의 일념(一念)으로 의병(義兵)에 투신하였네. 두 의병장과 더불어 군무(軍務)를 논하고 동지들과 함께 군자금을 모금하였네. 사세(事勢)가 불리하여 일제(日帝)에 피체(被逮)되어 꽃다운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