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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1889년 11월 18일에 군위군 부계면 신리동 만제에서 출생하였다. 생계는 조선조 개국초에 왜구정벌로 무훈을 세운 휘 성양은 포은선생의 고제로서 호는 금은이오 관 이조참판 시는 정헌이니 공의 17조 이시다. 이 뒤로 문장덕업과 현관음직이 세대로 이어져 왔고 고 휘 세환 호 이산은 학행이 높은 거유로서 양도내의 존앙을 받았다. 비는 부림홍씨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기상이 영매하고 뜻이 강개하였다. 일찍 사기를 읽을때 충신열사의 전에 이르러서는 비분허희함을 거듭하였다. 1910년 경술의 국치를 당하자 망국의 슬픔에 사모쳐 조국독립을 성취코자 항일전선에 신명을 바칠뜻을 굳혔다. 때에 만주 간도에 망명한 애국지사들의 독립운동조직체인 북로군정서 부속 흥업단원들이들이 독립자금을 조달할 목적으로 1921년말에 이만준 전인제등을 국내에 밀파하였다. 이들은 대구 밀양산 등지에 거점을 두고 공을 비롯하여 손기성 권충락 이재술 김연환 최명해 심상욱 박사림 정락산 손재헌 손원헌 우홍기 박수의 권정락 홍종락 김종만 양한위등 동지를 규합하여 영남일대를 무대로 삼아 모금운동을 전개하니 공은 홍종락 이재술 양한위 권충락 김종만 권정락과 함께 달성 영천 청도 등지에서 암약하던중 다음해 1울에 홍종락이 대구에서 이어서 이재술 김우창이 군위에서 차례로 피체되었으나 공은 이에 좌절되지 않고 남은 동지들과 함께 왜경의 핏발선 감시망을 뚫고 계속 활약하여 다액의 자재와 모금한 돈을 본부로 비송하였다. 공은 상봉하솔한 처지로 가산을 탕진하니 향내에서까지 방탕인으로 오인을 받았으나 공은 가슴깊이 간직한 비밀만은 비록 부모형제간에도 누설치 않았다 마치 주군의 복수를 위하야 훼형위장하고 다리밑에서 숨어서 때를 기다리던 예양의의 자학에 비할까 다만 공의 복수토적의 일념은 십재 풍상속에 더욱 걷어만 갔다. 그러나 하늘은 잔인해서 공이 설 땅은 어디에도 없었다. 동지들은 연달아 피체되고 경찰망은 압축되어만 갔다. 사건의 관건을 잡은 공이 피검되면 일이 더욱 악화될것을 우려한 공은 비장한 결의를 하고 1928년 8월 2일 의성군 금성면 학미동 구고동에서 천고의 한을 품고 순의하였으니 때에 나이 40세였다. 나라 원수 갚지 못하고 부모께 종양의 효를 다못드린 공의 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