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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앞장섰던 지사는 1919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 궐석재판에서 징역 6월형을 언도받았다. 1919년 4월 지사는 최재화 김수길 이종식 이영옥 이영식 등 항일투쟁 혈맹동지들과 비밀결사 혜성단을 조직하여 학생운동을 전개하면서 지하활동 중 5월에 피체되어 대구구치소에 수감되었다. 1921년 4월 29일 대구지방법원 판결에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언도받았다. 1919년 계성학교 졸업 후 1923년 숭실전문학교 문과를 2년 수료하고 조도대학 정치과에 재학 중 1923년 9월 1일 일본에 관동대지진이 일어나 수천명 우리 동포가 도륙당하는 그 참상 속에서 간행히 구명되어 고향에 돌아왔다. 1924년부터 향리에서 농촌계몽운동과 문맹퇴치를 위해 다년간 헌신 지도하였다. 1930년 학미교회에서 장로 장립을 받았다. 요시찰인으로 자유를 잃은 지사는 농경생활 중 1945년 을유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였다. 1947년 정해 음 3월 13일 부친의 정각 소은정을 건립하였다. 1961년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 신학교를 졸업하였고 1963년 경중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1972년 경중노회 제36대 노회장에 피선되었다. 중리교회 장림교회 분토교회 대제교회를 거쳐 전흥교회에서 담임 목사로 시무 중 1980년 경신 4월 15일 향년 84세로 대구에서 서거하셨다. 정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1987년 정묘 9월 26일 향년 92세로 대구에서 서거하신 부인 이선이 여사와 1992년 임신 12월 4일 경북 의성에서 대전국립묘지 애국지사 제1묘역으로 합부 천장하였다. 슬하에 자 태갑 태동 태종 자부 이정길 백영숙 강신임이고 여 하월 하수 춘수 점수 진월 여서 이종민 정성하 김진호 이정복 장명식이며 손 10명 외손 8명이다. 경건한 신앙생활 청렴한 선비 정신 고매한 인격 투철한 애국애족심 지극한 효성 71년 해로한 장수의 복 청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