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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年) 3월(月) 27일(日) 또한 이곳에서 사랑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품 안으로 돌아가게 되었으며, 그의 유해(遺骸)는 당시(當時) 적(敵)의 가법(苛法)으로 이곳 공동묘지(共同墓地) 유좌(酉坐)에 묻히었다. 그의 세휘(世諱)는 이양호(李良護)요 양준(良俊)은 그 자(字)다. 이씨(李氏) 원래 계림(鷄林)의 급량부인(及粱部人)으로써 시조(始祖) 알평대인(謁平大人)이 육부족(六部族)을 이끌고 거서간(居西干)을 받들어 신라천년(新羅千年)의 기업(基業)을 열어 고려(高麗)를 거쳐 근세조선(近世朝鮮)에 이르도록 명공거경(名公巨卿)이 잇달았으며, 여말(麗末)에 문정공달충(文靖公達衷)은 문장위망(文章位望)이 일세(一世)에 올렸고 능(能)히 조선태조(朝鮮太祖)를 초래중(草萊中)에 섬발(韱拔)하였으며, 중세(中世)에 다시 남하(南下)하여 이곳에 세거(世居)하였으며, 구계중립(龜溪中立)은 도산(陶山)의 지결(旨訣)을 받아 문학행의(文學行誼)로써 일컬었으니 이 이가 그의 12대조(十二代祖)였다. 세급(世級)이 점점(漸漸) 내려오매 고조(高祖) 득벽(得檗)·증조(曾祖) 장의(章毅)·조(祖) 병천(並天)·고(考) 종도(鍾道)는 다 벼슬하지 않았으며, 외조(外祖)는 영천(永川) 이성수(李成壽)라, 배(配)는 신안(新安) 주씨(朱氏) 전택(銓澤)의 딸로서 자(子) 귀철(貴徹)이요 딸은 백시영(白時榮)에게 시집갔다. 귀철(貴徹)의 자(子) 영길(榮吉)·영환(榮煥)이요 시영(時榮)의 자(子) 창길(昌吉)·창환(昌煥)이요, 다음은 다 어림. 그는 일찍 한학(漢學)을 닦아 충효(忠孝)의 길을 배웠으며, 다시 예수교에 들어 집사(執事)로 되어 불의(不義)에 반항(反抗)하는 푸로테시탄트의 정신(精神)을 받아 항상(恒常) 민족(民族)의 비운(悲運)에 강개(慷慨)하여 민 영환(閔泳煥)·이 준(李儁) 제공(諸公)을 흠모(欽慕)하더니 기미운동(己未運動)에 이르러 드디어 이같이 입접(立節)하였다. 그는 출옥(出獄)의 길에 아들의 났음을 듣고 탄식하기를 “장래(將來) 이류(異類)의 노예(奴隸)로 하기보다 차라리 내손으로 없애버리지”하여 없애려고까지 하였다. 이로써 그의 강렬(强烈)한 항쟁의식(抗爭意識)을 엿볼 수 있다. 귀철(貴徹) 성장(成長)하자 우리 겨레의 광복(光復)이 왔다. 체백(體魄)을 개착(改厝)하려 하나 수심년(數十年) 안치(安置)의 뒤에 차마 천동(遷動)하기 어려워 이에 그 풍렬(風烈)을 추앙(追仰)하는 사회인사(社會人士)와 협의(協議)하여 그 유촉(遺囑)을 돌에 새기려고 불망(不忘)에게 부탁하매 감(敢)히 불문(不文)으로써 벽거(辟拒)하지 못하여 위에 대략(大略) 찬차(撰次)하고 다시 그의 정신(精神)을 노래로써 새기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