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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결됨에 나라가 어지럽게 되자 직을 버리고 귀향하여 후학교육에 전념하셨다. 。1907년(정미) 정동면장 。1909년(을유) 비안군 사립병산학교 설립 유교문화를 바탕으로 인재양성에 힘을 쓰고 그 후 안계 보통학교 설립에 앞장섰다. 。1915년(을묘) 안계 금융조합장 역임 。1935년(을해) 향리의 숙제사업인 안정 지를 백학산 기슭 갈곡에 건설키로 추진위원회를 조직하여 3년여에 걸쳐 완공하여 한건한 농지가 수리 안전답으로 바뀌어 쌀 증산에 크게 이바지하여 부자 마을이 됨에 향민들이 그 뜻을 기리는 송덕비를 마을 입구에 세웠다. 。1920년(경신) 비안향교 유도진흥회 회원으로 활약하여 1940년(경진)부터 1945년(을유)까지 직원(현 전교)을 역임하면서 향교를 배움의 전당으로 많은 유생들을 교육하여 인재양성에 힘을 기울였으며 조국이 광복되자 우리말 한글을 가르치는 중등강습소를 군립으로 설립하고 유공인사를 강사로 초빙 유생교육에 전념하여 현 안계중학교 설립의 모체가 되었다. 。1939년(을묘) 향리에서 양산되는 양잠을 이용한 직물공장 삼흥기업을 창립 경영하여 우수한 상품을 국내는 물론 일본까지 수출하여 지역경제 성장에 크게 기여하였다. 。1905년(을사)부터 종사 일에 몸을 담아 단양 시중공 묘소 관리를 위해 추원계를 만들어 문중기금을 마련하여 1919년(을미)에 단양군 적성면 애곡리에 대지 700평 전답 1만2천평(1947년 농지 개혁으로 현 4천평) 임야 94정(현 27정)을 마련하고 희역당 재사와 주사를 지어 관리인을 두고 묘소관리와 시향을 오늘까지 잇게 하였다. 。1921년(신유)에서 1926년(병인)까지 8세 양동 우탁 선조의 적자(휘 원광.원명)를 두었는데 길생을 양자로 왜곡 날조하는 시비를 가리기 위해 각 가차기와 5대보를 근거하여 변호인 없이 직접 변증하여 재판에서 승소 상계를 바로 세웠다. 공이 남긴 기반으로 교촌리는 날로 발전하였다. 공의 손 동화가 2000년 고희를 맞아 전통한실을 지어 귀향한 후 선대에서 못다 한 일을 계승코자 앞장서 리민을 단합하여 2002년 정부로부터 녹색농촌체험마을로 지정받고 마을 발전기금 1억 8천만원을 모아 초등학교 폐교를 인수하여 정부로부터 8억여원을 지원받아 전국에서 으뜸가는 농촌체험시설을 갖추어 전문직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