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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률은 1919년 3월 합천 해인사를 비롯한 경남 지역의 만세운동에 참가한 뒤 만주로 건너가 서간도 유하현의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국내로 돌아와 문경 일대를 무대로 독립군 양성을 위한 군자금모집 활동을 하였다. 1919년 3월 만세운동이 일어나던 당시 해인사 부속 학림의 학생으로 재학하던 김봉률은 해인사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서울에서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자 김봉률은 송복만·최범술 등과 함께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하고,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기 위해, 대구 등지로부터 30,000여 장이나 되는 종이를 구입하는 한편, 해인사의 등사판과 학교 등사판을 몰래 가져다 비밀리에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였다. 또한 이들은 해인사 만세운동에 이어 경남 각지로 만세운동을 확산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리하여 김봉률 등 학생 대표 30여 명은 각기 지역별로 분담하여 3인씩 대를 조직하였으며, 이들은 각기 분담한 지역에서 활동하다가 통영에서 집결하여 독립만세운동을 펼치기로 약속하였다. 김봉률은 강재호·기상섭 등과 함께 일대를 이루고, 경주·양산·통도사·범어사·동래·부산·김해지역에서 활동하였다. 그런데 거창·안의·함양·산청·남원 등지에서 활동하던 동지들이 일본헌병대와 일경에게 검거되면서 통영에서의 만세운동은 계획대로 실행할 수 없었다. 그뒤 김봉률은 강재호·송복만·손덕주·박덕윤·김장윤 등 10여 명과 만주로 건너가 윤기섭·지청천 등이 운영하는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후, 독립군에 편성되어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1920년 9월 경, 김봉률은 박달준·김장윤 등과 함께 군자금 모집을 위해 국내로 잠입하였다. 이들은 경남 합천군 가야면을 근거지로 삼고, 군정부의 인감과 영수증을 만든 후에, 경상도·충청도 일대의 사찰들을 돌아다니며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그러던 중 1921년 1월 경, 문경 금룡사로 잠입하였으나 주지의 밀고로 피체되었다. 그는 이 일로 1921년 5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