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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되었으므로 당시 조야인사가 선생의 충의를 감탄하였고 을사 5월에 민보국 영환씨가 선생을 대하여 선생의 고의를 감복하며 조양명봉이라고 격찬하였다. 동년 7월에 우룡택, 지용택, 이우석, 이병구와 상의 하여 일본공사관을 분쇄코자 하다가 구금되어 위력과 이해로써 유협하여도 종시 불굴항쟁타카 고문을 받아 이가 부수어지고 늑골이 세개나 부러졌다. 칠삭의 구욕을 받고 익년 정월에 출옥하니 소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일본의 통감부가 설치되었다. 선생이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곧 조충정공 병세, 민중정공 영환 양선생 순국 즉후에 한참정 규설을 왕방하여 명읍하시니 한참정의 말씀이 이 몸이 죽지 않코 구차히 살아있으니 조민 양공에게 수괴하다하거늘 선생이 답하시되 우리 임금이 게시니 어찌 죽는것을 귀타카하리오 기회따라 복수하자 하시고 돌아오시어 허위, 이강년 동지 2인에게 ?통하여 혜화동에 집합하여서 의병을 일으키로 결의하고 허씨는 안동을 중심으로 하여 강원도를, 이씨는 상주를 중심으로 하여 충청도를, 선생은 금산을 중심으로 하여 전라도를 거쳐 의병장 최익현과 합세하여 모두 합께 서울로 오기를 치지혈서로 약속한바 거사즉전에 전일 상처의 협통이 다시 터져 뜻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허,이,최 3선생이 순사하였음을 듣고 더울 상심되어 통세는 악화되였다. 선생은 항상 생불섬적이라 사위나귀라하여 필망수국하라라 두고보자 두고보자 구호하시다가 계축12월 24일에 장서하시었다. 아아 애석하다 금석이 어찌 선생마음보다 굳으며 산악이 어찌 선생의 충절보다 높다하리오. 선생사후 33년만에 과연 적은 망하고 조국은 광복되니 선생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