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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당 이상덕공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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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당 이상덕공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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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벼슬을 살 수 있다 하자 임금을 섬기려 하며 임금을 속이는 일은 선세에도 있지 않았다고 엄히 물리쳤다. 국운이 기울던 1905년 가을에는 선비 5백여 인과 연명상소하여 망국의 병폐는 인재등용의 실책과 탐관오리의 사욕이 자초한 결과라고 직언을 서슴지 않았으며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거듭 상소하되 강화하여 왜적을 영접한 5적신의 죄상을 폭로 비판하니 붓끝에 서릿발이 섰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매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며 한강에 피눈물을 뿌렸다. 고종 승하에 남 먼저 상복을 입고 자제들과 망곡하자 곁에서 안위를 걱정하매 우리 임금님 위한 일이라 죽더라도 여한은 없다 하고 곧바로 향교에 통문하여 곡반의 거행을 촉구하였다. 이로써 선생은 왜경의 요시찰 인물이 되었으나 기미독립운동에 동참하여 곽종석 장석영 송준필 등의 유림대표 137인과 연명으로 파리장서에 서명하고 대의로 국맥을 회복하려 하였다. 이로 인하여 동지들이 체포 구금되자 선생은 광호로 자처하고 산야를 떠돌며 삼천리를 가도 한가한 땅은 없고 육십 생애에 죄 지은 몸 뿐이라 호곡하였다. 삼사년을 숨어 살다 귀가하여서는 성심으로 선업을 잇고 사의로써 후진을 이끌되 대한인으로 떳떳하라 타일렀다. 선생의 가슴은 망국민의 한과 적개심으로 가득차서 갑연을 베풀려는 자제들을 꾸짖어 포로된 몸 살아 있음도 부끄럽다 하였고 단발령이 내리자 보발설을 지어 맞섰다. 1935년 편찬한 금릉속지 발문에서도 왕풍이 사라진 옛 고을일망정 향사까지야 어찌 한가지로 묻어 전함이 없게 하랴 하였으니 비록 국권은 빼앗겼으나 결코 민족혼은 빼앗길 수 없다는 노지사의 광복염원에서였다. 이해에 총독부의 의례준칙에 3년상과 4대봉사 단축설이 발표되자 중병에도 분연히 일어나 총독부에 보낼 준엄한 반대성명을 작성함에 추호도 용서하는 기색이 없자 곁에서 또 염려하니 선비의 가슴에 춘추대의를 품은 자가 인륜이 끊어져 금수가 되는 지경을 당하고도 화가 두려워서 말 한 마디 못하는 게 옳단 말인가. 크게 꾸짖고는 남을 시켜 우송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수 차례나 일경의 갖은 협박에 위태로웠으나 선생은 저를 보기를 모기떼 같이 여기었고 죽을 자리를 얻었노라 공언하는 지사의 단심을 저들도 감히 꺽을 수 없었다. 1936년 11월 총독부가 조선력을 폐지하자 우리 역사를 적을 달력조차 없어졌다. 통분하여 병이 더욱 악화되니 선생은 자만시를 지어 살아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