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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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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대한제국 궁내부의 통신사 전화과(電話課) 주사에 임명된 최학길은 매관매직과 탐관오리를 척결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1908년에는 영남 지역에서 계몽사상을 보급하고 신교육을 진흥할 목적으로 조직된 교남교육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나 1910년 8월 일제에 국권을 빼앗기자 귀향하였다. 1919년 3월 1일 전국적으로 만세 시위가 전개되는 가운데 영남 지역의 곽종석·김창숙 등과 호서 지역의 김복한 계열 인물들이 중심이 되어 파리강화회의에 독립 청원서를 보내고자 하는 파리 장서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최학길은 동향의 이경균, 이명균, 이석균 등과 동참하여 서명했다가 1919년 4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고초를 당하였다. 1995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2008년 10월 30일 김천향토사연구회가 주도하여 김천시 조마면 신안4리 남애정에 ‘구재 최학길 선생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출처 : 모바일 향토문화 전자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