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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여중룡 선생 순충 기념비 안내문(南隱 呂中龍 先生 殉忠 紀念碑 案內文) 선생의 휘는 중룡(中龍) 호는 남은(南隱) 본관은 성산(星山) - 1856년 구성면 금평리에서 출생. 1895년 국모(國母)가 시해되자 허위, 강심형, 조동석과 금산장의군(金山仗義軍)을 조직하여 항일전을 펼쳤다. 1896년부터 애국지사 133명을 규합하여 충의사(忠義社)를 조직하고 일제에 항거하였으며, 이등방문에 항의문을 보내고 각국 공사관에 배일 협조요청을 하였다. 정부에 배일 정책 상소(33호), 황성신문에 일제 침략에 대한 비판 논설 게재로 일경에 감시를 받게 되었다. 1905년 이병구, 우용택과 일본공사관 방화 폭파기도로 피검되었으며, 이때 고문으로 치아와 늑골이 부러지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1905년 민영환, 한규설, 심상훈 참정에게 나라 구할 것을 협약하였다. 1906년 허위 이강년과 전국의 병기사실행 직전 고문으로 인한 병세악화로 죽어서도 원귀되어 일제타도란 유언을 남기고 순국했다. 1919년 유림에서 충의(忠義)포창완의문을 내렸다. 1977년 건국훈장이 추서되었고 선생의 유해는 국립묘지로 모셔졌다. 1999. 6.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