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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어나자 연백으로 달려가 동지를 규합 항일군을 조직하는 한편 임시정부 연락원인 아우 덕렬(德烈)공을 상해로 밀파 국내외 연합전을 꾀하다가 이른바 구월산주비단 사건으로 1920년 해주에서 1년반 복역하고 출옥하자 곧 상경하여 박영효(朴泳孝) 김시점(金時漸) 제씨와 더불어 무력항쟁을 꾀했으나 왜경 감시로 어렵게 되자 1922년 중국으로 떠나 산해관에서 양기탁(梁起鐸) 남정(南正) 제씨의 협조로 의성단(義成團)을 조직했다. 단원 7인을 이끌고 봉천에서 시가전을 벌이고 장춘에서 왜인 병원을 습격하는 등 곳곳에서 왜경을 처치하는 한편 국내에 폭탄을 반입하기도 했다. 또한 안창호(安昌浩) 양기탁(梁起鐸) 제씨와 손잡고 길림성에서 광복단 외 10개 단체의 행동 통일을 위한 통일회(統一會)를 조직하고 나아가 중국내 모든 단체를 합쳐 일대 항일군을 편성하려고 동분서주하다가 김성근의 밀고로 1924년 하얼빈에서 잡혀 7년형을 받았고 반역자 김은 이범석(李範奭) 장군에게 총살 당했다. 선생은 신의주에서 복역 중 옥질로 보석되어 선천 미동병원에서 가료하다가 퇴원하고 끝내 안동적십자병원에서 「죽거든 만주땅에 묻고 조국 광복 전에는 국내 이장을 말라」고 유언 1928년 12월 6일 향년 37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선생의 유해는 만주 안동현 전강산 장군봉에 묻혔는데 광복 후 국내로 이장하려던 뜻은 이루지 못했으나 1962년에 건국공로훈장 복장이 추서되었다. 선생은 시조 도독(都督) 갈송공의 15세손으로 후사에 덕렬(德烈)공의 2남 충무(忠茂)를 입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