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page


112page

경북 성주 사람이다.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한 파리장서에 한국 유림대표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으며, 4월 2일 성주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거국적인 3·1독립선언식의 민족대표 33인 중에 유학자들이 빠지게 된 것을 통분해 하고, 또 일제가 광무황제에게 결재하도록 강요한 독립불원서에 유림들이 들어있음을 알고, 한국 유림들이 조국의 독립을 간절히 원하고 있는 진정한 의사를 직접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데 참여하였다. 이에 그는 소위 파리장서라고 하는 2,674자의 장문에 곽종석·김복한·김창숙·이기정 등 한국 유림대표 137명 중 한사람으로서 서명하였다. 그후 이 파리장서는 김창숙이 상해로 전달하였고, 다시 파리에 한국대표로 파견되어 있던 김규식에게 송달하였으며, 국내의 향교에도 우송되었다. 그리고 이기정·이기원으로부터 서울에서 전개된 독립선언식과 다른 지방의 독립만세운동 상황에 대하여 자세히 전해 들은 그는 송회근 등 송씨문중의 유력자들을 불러놓고 이 지방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에 이기정·송회근·성대식·송수근·송문근·이봉희·송인집·송천흠 등이 찬동하여, 성주읍 장날인 4월 2일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한편, 유진성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도들에 의한 독립만세운동 계획이 있음을 안 그는 이들과 협의하여 함께 공동전선을 펴기로 하고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사전준비를 마쳤다. 4월 2일 오후 1시, 점차 시위군중이 시장으로 몰려들고 있을 때, 먼저 경산동 관제묘 뒷산에 집결하였던 기독교도들이 태극기를 높이 들고 시장을 향하여 독립만세를 외치자 그도 시장에 모인 3천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겁을 먹은 일본 경찰주재소에서 발포하여 시위군중을 해산시키려 했으나,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이에 굴하지 않고 밤 11시까지 계속해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그후 일제의 대대적인 검속 때 체포되어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출처: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