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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이 일제에 의해 강탈당하자, 조국광복을 위하여 기회를 엿보던 중, 파리 강화회의의 내용과 서울에서 거사된 독립선언식 및 독립만세시위에 대하여 전해 듣고, 순천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기로 결심하였다. 1919년 4월 7일 오후 1시경, 마침 순천읍 장날이어서 장터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자, 그는 백지 1장을 사 가지고 남문 누상에 올라가 독립만세운동의 취지와 정당성을 연설한 뒤, 백지를 흔들며 수회에 걸쳐 독립만세를 선창하니 남문부근에 모여있던 수백명의 시위군중이 대한독립만세를 회창하여 장터는 삽시간에 독립만세소리로 천지가 진동하는 듯 하였다. 이 사실을 안 일본 헌병이 와서 그를 잡아가자, 그는 의연히 독립만세를 외치며 헌병분견소로 연행되었다. 결국 이해 4월 26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징역 10월형을 받아 옥고를 치르던 중, 일제의 잔혹한 고문으로 말미암아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