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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장 추서)의병장 휘하의 군자금 조달 막료인 권덕윤 종숙과 더불어 전재산을 담보로 군자금 조달은 물론 수많은 격전지에 자진출진 많은 전공을 세우겼다. 그러나 공이 순천거점 의병진의 실질적 자금조달책이라는 사실을 감지한 왜 관헌들의 끈질긴 추적핍박에 노심초사하시던 공의 선고 휘 치택은 1908년 8월 10일 안타깝게도 천수를 다 하지 못하고 타계하시고 공 마저 왜의 토벌대에 피체 압송중 그간의 행적으로 미루어 극형에 처해질것이 분명한바 이에 필사적 탈출을 도모하였으나 애석하게도 현장에서 순국하시니 그떄가 1909년 음 5월 2일이요 향년 39세였다. 그러나 이듬해인 1910년 마침내 이 나라는 일제에 강점 당하고 말았으니 오호라! 수 많은 애국선열들의 한 맺힌 넋을 그 무었으로 위로 할것이며 더구나 전재산을 군자금으로 다 바쳐버림으로서 온가족의 끼니마저 어렵게 되었을뿐만이 아니라 왜의 무서운 감시까지 받아가면서 나날을 살아가야 하는 유족들의 그 참상을 어찌 다 형언하리요. 그런 상화에서도 공의 미망인 밀양손씨 맹화는 당시 겨우 열살 내외의 어린 5남매를 거느리고 순국선열의 부인답게 의연하게 수절하며 사시다가 58세에 한많은 생을 마치혔다. 공의 순국기록은 사손의 끈질긴 추적끝에 기적적으로 발굴 늦게나마 그 높고 거룩한 큰 뜻이 높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