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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불행한 가정환경속에서 자라면서도 일찍부터 서당에 나아가 구학문을 수학하였으며 26살 때에는 자신이 직접 서당을 열어 구국항쟁에 투신할 때까지 후학양성에 헌신하였다. 1907년 일제의 강압에 의해 고종황제가 강제로 퇴위되고 이어 군대도 강제 해산됨에 통분하여 각지에서 다투어 의병이 분기하자 이에 호응하여 창의의 기치를 들고자 결심한 뒤 제자를 키우던 생활을 청산하고 항일투쟁전선에 뛰어들었다. 드디어 1908년 같은 고향의 우국지사인 김명거·김화삼·권덕윤·김병학 및 곡성의 감양화 등과 더불어 결의하고 의병의 소모, 무기구입, 적의 움직임에 관하여 밀의를 거듭하면서 의병부대를 편성하고 이어 창의계획을 구성하였다. 그해 6월에 의병부대를 인솔하고 승주군의 조계산으로 나아가 유진하면서 훈련하였으며, 7월에는 죽음을 맹세한 동지 33명이 이 의병진에 합세 가담하였다. 그후 보성 곡성 등지에서 활약하던 조규하와도 동맹하니 그 휘하의 의병군 40여 명이 다시 합류한 뒤 조규하와 더불어 작전전술을 숙의하였다. 1908년 8월 곡성군 석곡면의 조지촌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접전하였는데 불행히도 조규하가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이 후 목사동으로 진격하여 일본군과 교전하였으며, 8월 25일에는 곡성의 통명산에다 진을 쳤다. 또한 9월 23일에 적을 기습 공격하여 일본군 3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두었고 10월초에는 남해 장도에서 전개된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어 10월 5일 전남 고흥군 과역면 과역리 시장에서도 일본군과 접전하여 적 수명을 사살하고 무기 등 다수를 노획하였다. 그러나 그 달 9일에 여수 화양면 원포리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배하여 의병진을 수습한 뒤 승주군 쌍암지역으로 회군하게 되었다. 그후에도 부하들로 하여금 각지에서 유격전을 전개하도록 지시하면서 자신도 승주 곡성 및 화순 등지에서 산병전을 펼쳐 관내를 휩쓸면서 적을 교란시켜 격파하니 전라도 일대에 그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이듬해 1909년 1월부터 4월에 걸쳐 승주군 서정병참소를 습격하는 등 많은 항일투쟁을 전개하고 나서 4월에 남원으로 의병진을 이끌고 진격하여 곡성부근 섬진강의 지류인 압록강에서 적군 병참소를 습격하였다. 4월말에 곡성의 서순일 의병부대가 이에 합류하니 총 240명 정도의 병력을 기록하게 되었다. 이어 5월에 석곡의 일본군 병참소를 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6월 11일 강진원 의병진이 승주군 서면 당천리의 색천사정에서 노숙하던 중 일본군의 앞잡이 김원학이 인솔하던 구례군 헌병대의 기습을 받게 되어 참패하고 퇴각하였다. 그런데 1909년 일제의 의병초토화작전으로 인해 많은 의병항쟁이 중과부적으로 쇠퇴됨에 따라 강진원의 의병진도 6월의 패전 이후 활동하지 못하다가 그해 말경에 해산된 듯하다. 즉 강진원은 1909년 8월 중순 남해의 통영 연내도로 일단 피신하였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두모리 오성산 외딴 동굴에서 은거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그 뒤 그의 은신처가 발각되어 체포되자 자결 순국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