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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생가터 - 조경한(趙擎韓) 1900~1993 순천 주암 한곡 238 1919년 3.1운동 후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독립단, 배달청년회 등에 참여하고, 광복을 맞을 때까지 만주와 중국에서 활동하였다. 1930년 7월 북만주에서 한족자치연합회.생육사.동빈현주민회 등의 단체들이 한국독립당을 창당할 때, 홍진.지(이)청천 등과 함께 참여하고 선전위원장에 임명되어 조직 및 훈련 책임을 맡았다. 1931년 9월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한국독립군의 일원으로 중국의 구국군 및 시세영.오의성 부대 등과 연합해 대일항전을 전개하였으나, 1933년 말 한국독립군이 오의성 부대에 포위되어 무장해제 당한 사건으로 연합작전은 중단되었다. 이 무렵 난징에 있던 김구(金九)에게서 함께 일하자는 제의가 잇어 지(이)청천 등과 중국으로 이동하여 낙양군관학교가 개교되었을 때 교관을 맡아 군사간부를 양성하는 한편, 1934년 3월 만주에서 온 한국독립당과 난징의 한국혁명당의 합당을 추진, 신한독립당을 창당하였다. 또한 신한독립당 대표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에 참여해 각 정당.단체의 통합운동에 주력하여 1935년 7월, 5개 정당.단체가 통일을 이룬 민족혁명당이 결성되었다. 민족혁명당에서 김원봉과 마찰로 탈당 후 1937년 4월 지(이)청천.최동오 등과 함께 조선혁명당을 창당하였고, 1937년 8월 민족주의 진영이 결성한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에서 선전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39년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의원으로 선출되어 1944년까지 활약하였으며, 1940년 5월 충칭[重慶]에서 민족주의 계열 3당이 통합.창당한 한국독립당에 참여하고, 중앙상무집행위원 겸 훈련부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1940년 9월 임시정부에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주계장에 임명되었으며, 그 해 11월 총사령부를 전방지역인 산시성 시안에 설치하면서 총사령부 총무처장 대리를 맡았다. 1943년 국무위원회 부 비서장에 임명되고, 1944년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 선임되어 8.15광복 때까지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63년 6대 국회의원, 1981년 독립유공자협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그 공훈을 널리 알리고자 이 표지판을 세웁니다. 2019.11. 순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