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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였고 안동권문에 우귀하여서는 지극정성으로 시부모를 봉양하고 군자를 공경하였으며 종부로서 봉제접빈의 규범에 철하였음은 물론 부군의 의병활약에도 은밀한 내조를 해오던중 불행히도 부군이 순국하는 붕성지통을 당하자 천신하○ 코자 하였으나 주위의 만류로 번연개심하여 파산된 가정에서 호국지책으로 소천을 대신하는 궁경치가로 유충한 5남매 양육에도 배전의 정성을 이우리면서 청검수절로 인고의 58세 생평을 마치니 그 일화가 인구에 회자되고 경사에 청문되어 순천향교와 성균관에서 열부로 포상하였다. 3, 공의 서자 재회는 자는 재봉 호는 농은 우호 송설로 고결 35년 1898년 윤 3월 3일생인데 겨우 12세때에 선고께서는 의병활동 군자금에 전가산을 다 바친 상태에서 순국하셨으니 유족의 생계가 막막 호구지책으로 두 숙부는 무작정 출가하고 나머지 가솔은 품팔이로 근근연명함제 그때의 고초를 어찌 다 필설로 형언하리요 설상가상으로 군자금과 관련된 빚 독촉까지 겹쳐 서당까지도 중단하였으나 이 같은 극한고난중에서도 결코 좌절치 않고 편모에 대한 효성은 물론 일생을 오직 정직과 근면 성실로 각고정려결과 급기야는 자수성가로 면지 대농이 되니 세인들은 공을 독농 선각자라 칭하였을 뿐만 아니라 위로는 위선사업과 아래로는 후진양성을 위하여 지극정성을 다 바친 숭조하애한 독농효자로 타의 귀감이 되었기 성균관에서 표창하였다. 자부 유인 장수황씨 수엽은 1899년 8월 28일이며 인화의 녀로 세인이 다 싫어하는 빈한유고에게 우귀하여 20대 종부로서 인궁한 살림에도 시모 봉양에 정성을 다하여 육찬이 없으면 계곡의 어해라도 잡아다 진공하였고 가훈을 준수하며 1남 4녀를 훌륭하게 양육하였을 뿐만아니라 극심한 식량난때에는 남 모르게 인근 임산부들에게 쌀과 미역을 제공하고 아한 궁핍인에게도 시혜면궁케 하였으며 부군의 기질중병에는 문의구약하여 조석시탕 20여년 만에 ○이 완치케하는 등 효부 양처 현모로서 안동권씨 중앙종친회, 순천향교 성균관등에서 선행 효부로 포장하였다. 5, 공의 서손 후 표는 호는 남계요 1933년 8월 13일생으로 독자로 태어나 귀히 성장 어려웠던 시기였음에도 부모의 은덕으로 대학까지 무난히 졸업 바로 관직에 이르니 서우특별시와 전라도청을 거쳐 여천 보성 순천 목포시 등에서 여러 과장을 거처 다시 도청에서 새마을계장 예산계장 사회과장과 여수시 총무국장 광주시산업국장 보건사회국장 보성 여수 순천 려수시의 부군수 부시장 시장직대 그리고 도지사 정책보좌관을 끝으로 3급 부이사관으로 단 한점의 오점도 없이 38년간의 공직을 마치면서 그간 수십회의 수상을 비롯 30여회의 각종 상패와 대통령표창 근정포장 홍조근정 훈장등을 받은 모법공직자로서 체귀후에는 문중 대소사는 물론 각단체에도 적극 참여 헌신봉사하였다. 특히 1997년 에야 고려대학교 노동대학원에 입학 영국 옥스포드대학게 까지 수학한 면학도였으며 3년여에 걸쳐 고향의 향토지인 승수읍지를 집필 출간하하는 큰 업적을 남겼고 성균관 전학에까지 이르는 등 일생동안 국가와 지역사회 그리고 문사에 헌신 봉공하였다. 6, 공의 서손부 경주김씨 순례는 한영의 녀로 1933년 3월 13일생인데 17세에 우귀하여 40여년이나 공직에 있 는 부군을 대신하여 종택을 지키며 궁경치가로 시부모 봉양과 2남3녀를 양육하며 봉제사 수선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