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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항래의사 흉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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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의 능평원이 생사를 오가며 애국한 충신과 어버이께 지성한 효자가 역사를 영롱케 하지 않았더라면 오늘도 아침해가 동녘에서 저렇듯 찬란히 떠오르겠느냐고 했던 바와 같이 충효의 소중함이 막언이건만 작금의 계셍서 그 말이 날로 빛을 잃으니 통탄불이(痛嘆不已)이다. 이러한 세태에서도 일가의 충효가 누대를 이어온다면 이를 어찌 발천하지 아니하여 옳을 것인가. 우리 안동권씨가 삼한 갑을의 현벌로 불리는데 이러한 문호가 또한 호남해우에서 일어나 승주부국을 빛내니 어찌 아름답지 아니한가. 1, 공은 우리 시조 고려태사 휘 행의 36세손으로 그 11대조 성균지사 남포 휘 분이 선고 이조판서 휘 대재의 당조여환을 피해 낙남하여 순천에 시거하니 이로부터 일향의 사부○식이 출세하였거니와 공의 자는 태화요 호는 남강으로 1871년 2월 18일생인데 구 한말 바다건너 왜구가 호시탐탐 이 나라 침탈을 기도하더니 급기야는 우리의 국모를 시해하는 을미사변 등 천인공노할 만행을 서슴치 않으먀 경향 각지에서 수 많은 의병들이 격발분기하면서까지 공 역시 이곳 순천을 거점으로 활약한 의병진에 자진출진 많은 전과를 올렸슴은 물론 특히 전 가산을 담보하면서까지 군자금 조달에 진력하셨다. 이 사실을 감지한 왜 관헌들의 끈질긴 추적핍박에 노심초사하신 부공 금준 휘 치택은 1908년 8월 10일 천수를 다하지 못하고 타계하시고 결국 공 역시 이듬해에 왜의 토벌대에 피체 압송중 그간의 행적으로 미루어 보아 극형에 처해질것이 분명한바 이에 필사 탈출을 도모하였으나 애석하게도 현장에서 순국하시니 그떄가 1909년 음 5월 2일이요 향년 39세였다. 공의 의병활동에 대한 공적기록은 뒤 이은 국치이후 일제에 의하여 오래토록 인몰되었으나 학계와 후손들이 끈질긴 추적끝에 기적적으로 발굴 고증되어 늦게나마 그의 높고 거룩한 큰 뜻이 높이 평가되어 200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고 국가독립유공자 공훈록에 수록되었다. 1, 공의 배위 유인 밀양손씨의 휘는 맹화로 고종7년 1870년생인바 자유로 총명 온후 정숙하여 경노효친의 수범을